요즘은 화려한 주인공보다 그 옆에 서 있는 조연들에게 자꾸 눈이 간다.
잔소리가 실감나는 정 많은 엄마, 진짜 술을 먹은 게 아닌가 싶은 주정뱅이,
어디서 한 번 만났을 법한 고시원 주인처럼, 주인공이 펼치는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조연과 단역들. 가끔은 드라마 속에서 빠져나와 생각했다. 회식 자리에서 그들은 어디에 앉을까.
뛰어난 외모를 타고난 스타와 성공한 배우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잘 가고 있을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을 보고 부아가 나서 이불을 싸매고 누워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가끔은 그들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 같아서 응원을 하곤 했었다.
잘돼야 해요! 꼭 잘될 거예요! 하면서.
이정은도 그런 배우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복스럽고 평범한 외모로 현실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연기를 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저런 배우는 정말 잘돼야 하는데’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정작 응원을 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어느 날, TV 드라마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잘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른 게 뭔지 알아?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나 여기 살아 있다. 나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 사는 거야.
잘난 거는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거는 니 하기 나름이야.”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에서
잘나가는 친구들 모임에 다녀와 밥도 안 먹은 채 이불을 덮고 질질 짜는 딸에게
단호하면서도 따뜻하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이 대목은 배우 자신에게도 인상적이었는지,
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과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로 이 대사를 꼽기도 했다.
잘 살려면 믿어야 한다.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한테 씩씩대는 대신,
타고난 것들이 없다며 신세 한탄을 하는 대신, 지금 바로 이 자리, 이 시간,
이 모든 것이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토양이 되리라는 것을.
귀하지 않은 시간은 없고,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 길이 보인다는 것을.
그걸 믿어야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다.
*박애희의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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