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고요했던 나의 방이다.
하루 종일 용사가 마왕과 싸우는 모험 이야기를 홀로 상상하고,
그 장면들을 커다란 전지 가득 그려 넣는 일이 좋았다.
침대 밑에서 레고 박스를 꺼내어 주말 내내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았다.
책상 밑에 들어가 장난감을 가지고 여동생과 하루 종일 노는 일이 좋았다.
당시 내 방은 부엌 베란다와 이어져 있었는데, 때때로 어머니는 창문을 열어
우리에게 먹을 것들을 건네주곤 했다. 기억은 그곳에서 한 번 멈춘다.
어머니가 방 안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는 그 순간, 내 방은 갇혀 있던 시간에서 벗어나
'바깥'과 이어진다. 선선한 계절에는 바람이 살짝 든다. 그러면,
사실 나는 내 방에 고립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더 큰 품 안에 안겨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머니의 품, 아버지의 보호, 그런 것 안에서 나는 노닐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의 이야기와 상상과 시간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진짜 혼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늘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겨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절,
자유와 안정이 모순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었던,
어쩌면 인생에서 유일했고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그 시절의 느낌을 그리워한다.
어느 순간, 내가 이 세상과 매일 부딪히며 현실의 칼바람을 맞고 있다는 걸
깨닫는 바로 그런 순간에 말이다.
인생의 꿈이라는 것도 대부분 그런 온실 속에서 피어올랐다고 느낀다.
막연히 내가 가고 싶다고 느꼈던 저 바다 너머의 세상, 언젠가 자유롭게
날고 싶다고 느꼈던 하늘 속 구름들 사이, 무언가 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은 꿈을
품을 수 있었던 건 나름대로 내가 아직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야 스스로 안전을 책임져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고, 마냥 편하게 꿈꾸기도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안전에 대한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듯하다.
소년이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이를테면 베란다에 커다란 우산을 펴놓고
그 아래에 돗자리를 깐 다음 여동생과 레고를 조립하고 놀던 어느 오후의,
마음껏 꿈꾸어도 좋았던 그 마음에 대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매일 소년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가끔 소년이 된다. 또 가끔은
어느 소년 소녀들의 아버지가 된다. 그 순환이 내게는 일종의 삶에 대한 긍정처럼 느껴진다.
*산문집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에 실린
정지우의 ‘나는 소년이었던 때가 매일 그립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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