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갈이를 위해 화원에 갔다. 나에게 금전수 화분을 건네받은 아저씨는
식물의 끝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보다가 말했다.
예상보다 식물이 커서 더 큰 화분이 필요하겠다고.
뿌리가 안에서 빽빽이 엉켜 금전수를 꺼낼 수가 없다고.
아저씨는 파편이 튀지 않도록 화분을 비닐로 감싼 뒤 망치로 두드렸다.
금전수를 준비된 화분에 옮기기 전 아저씨는 그것을 들어 올려 뿌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작은 화분에서 이렇게나 자라고 있었네요.”
나는 화분의 모양대로 굳어진 흙을 촘촘하게 뒤덮은 뿌리를 바라봤다.
얼마나 둘레를 따라 돌았던 것인지. 어둠 속에서도 부단히 뻗어 갈 곳을 찾았을
그 막막함에 대해 생각하다가 제때 분갈이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금세 흙을 다 채워 넣고 기울어진 줄기 사이에 지지대를 꽂던 아저씨가 대답했다.
“당장에는 문제가 없지만 서서히 식물이 쇠약해지지요.”
분갈이하며 가볍게 들은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곳에 뿌리내린 채
점점 쇠약해진다는 말이 과거부터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느끼는 현실과 근접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시에 관련한 물음이었는데,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으면서
왜 전쟁에 대해 쓰냐고 했다. 그때 나는 말했었다.
배경이 된 탄피 공장은 나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일했던 곳이었으며
한 사람의 기억과 삶의 역사를 통해 그곳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나는 어머니를 통해 그 이야기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나와 가까운 이야기라고.
그 자리에선 내 생각을 말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잘 모르는 것을 말할 때 생기는
우려와 조심스러움은 충분히 공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어떤 일에 대해 말하는 걸 두려워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했다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상처받고 책망할까봐 두려웠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더 용기를 내고 싶다.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넘기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세상에 말을 건네고 싶다.
먼지 묻은 잎은 닦아주고 분갈이 후에는 바람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두라는 아저씨의 말을 곱씹는다.
나라는 식물은 어떤 화분에 옮겨 심을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창문을 연다.
*정다연의 <다정의 온도>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