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베를린의 공동주택에는 흔히 '옵션'이라고 하는,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 제공되는 기본 가구가 없어요.
이사가 처음은 아닌지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작업량을 생각하니 아득해졌어요.
독일인은 D.I.Y- Do It Yourself에 능숙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 전동드릴-드라이버가 있고,
그 밖의 공구류도 갖고 있어요. 각종 자재나 도구를 파는 홈 센터에 가보면 페인트와 벽지,
밀리미터 단위로 진열된 전동 드릴 비트, 저로서는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각종 코드,
욕조부터 조명 기구까지, 건물 바깥벽에서 안쪽을 다 수제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상품이 완비되어 있어요.
여기까지 쓰고 보니 독일에서 이사하기는 정말 번거롭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즐거운 시간이기도 해요. 판에 박힌 설비가 없기에
오히려 자신의 취향이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거주 공간을 꾸밀 수 있거든요.
입주 전에 텅 빈 집을 보면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일하고 싶으니 책상은 여기에 놓고,
즐거운 기분이 들도록 이 주위는 벽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등등 계획을 세워나가면 마음이 설레요.
제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 중에는 창의적인 사람이 많은데, 일상생활에서도 뭔가를 만들거나
상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인 듯해요. 방의 가구 배치를 어떻게 바꿀지 늘 생각한다는 지인은
가구가 필요할 때 가구점에 가지 않아요. 대신 벼룩시장에서 비슷한 걸 발견하거나 지인에게
물려받은 걸 자기 취향에 맞게 손봐서 완전히 새로운 가구로 만들어버려요.
그런 사람은 뭔가를 다른 용도로 바꾸는 데 탁월해요.
예를 들어 찻잔을 전등갓으로 만들거나 식물 재배용 용기를 벽에 붙여 선반으로 사용해요.
완전히 다른 물건으로 상상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이미 뭔가가 갖춰진 거주 공간은 편리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내 가치관이 영되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공간을 만들어가다 보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이상으로
여기는 삶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내 가치관과 마주하고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죠.
이런 경험을 거듭하는 동안 삶이 조금씩 알차지고 마음도 편안해지는 걸 느껴요.
저는 지금도 베를린에서 여전히 그 훈련을 하고 있어요.
*구보타 유키의 <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