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노트를 펼친다. 낡은 종이 사이로 진한 잉크 냄새가 난다.
한 줄 시詩로 시작된 나의 노트는, 언제부턴가 지나온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나는 이 노트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시를 쓰면서 문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견뎌왔을까 싶을 만큼, 시는 나에게 많은 것을 건네주었다.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보폭은 달라졌다. 시를 쓸 때
긴장된 걸음 대신 여유롭고 느슨한 움직임이 익숙해졌다.
수필 속 나는 조금 더 세세하고, 조금 더 친절하게 나의 시간을 더듬었다.
마치 조용한 산책처럼. 바쁘게만 살아왔던 나에게 수필을 쓰는 시간은
오랜만에 주어진 안식과도 같았다.
나는 태어나면서 한번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고,
그래야만 삶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눈물겹도록 외로웠던 순간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마음이 흐트러질까, 스스로 부단히 다잡았다.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고 소중한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밤잠을 양보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 나의 희망은 사랑하는 두 아들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도,
나 자신을 위한 부귀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건강과 안녕이 내 삶의 전부였다.
여느 엄마처럼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 책임감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보람을 두 아들의 성장이 증명해주었다.
한창 나의 손길이 필요하던 시기에 알아서 자라준 나의 두 아들.
'두 아들 이야기'는 나의 노트에서 때로는 한 줄로, 때로는 두세 장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일일이 손으로 짚으며 그날을 소환하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했다.
나의 노트는 친절하게도 많은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이제는 꿈꿨던 노트에 언제든,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컴퓨터 자판이 아닌,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가는 아날로그식 습작이 정겹다.
삐뚤빼뚤하고 힘이 빠진 펜글씨가 진지하게 다가온다. 저마다 다듬어지지 않아도,
어차피 살아가는 일상이란 원래 고르고 반듯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다 그러려니 한다. 어느새 나를 닮은 노트가 제법 두꺼워졌다.
묵직한 두께만큼 마음이 든든하다. 나의 시간을 온전히 담아낸 나의 노트.
내 행복의 정의에서 이 노트를 빼놓을 수 없다.
*손준식의 <시간을 담은 노트>중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