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년 후에 다시 오마!
맨발이*
2003.08.21
조회 62
형.
제주도에 왔습니다.가랑잎이 바람에 날리듯 떠나온 길이 제주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낭만을 찾아 떠나온 길이기보다 내심정에 내가 겨워 훌훌히 떠나왔습니다.
목포서 배를 탈 때는,무슨 저승에라도 닿는 그 길에 오른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형.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이란,바다를,혹은 내가 넘어온 수평선을 연한 풀이 상기도 새파란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내옆에는,그 어질고 가난한 면상을 지닌 말이,무슨 벗이나 되는 것처럼 함께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 등 뒤에는 맑고 깨끗한 한라산이 이마에 백설을 이고,허리에 구름을 감은 채 태연히 앉았고...

형.
이렇게 먼 곳(참으로 멀다는 거리감이 절실합니다)에 이르러,서울을,서울에서의 나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은,저승에서 사바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군요.
인간의 슬픔과 근심과 사랑과 저주가 한결 인간다운 노릇 같으면서,이제는 나와 아무런 관련을 지니지 않는,동화의 세계 같습니다.
그러니,그런대로,나그네가 고향을 그리듯,그것에 대한 미련이 가슴 아래 젖어옴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형.
오늘은 바다가 고요하군요,바다란 참으로 변화무쌍한 것입니다.순간마다 물빛을 달리하고 표정이 변합니다.이런 고요한 날에는 투명한 초록빛이 기름진 목장 같습니다.그러나,이내 이것은 침울한 표정을 지니고,사나운 손길이 이 기슭을 휘젓게 되겠군요.
그러나 이런 조용한 바닷가에 앉았으면,영원한 것,무한한 것 앞에서 실로 내 생명은 한 개의 포말 같은 느낌이 납니다.

형.
...이렇게 수평선과 마주 바라보고 앉았으면,내가'나'아니며,여러 천 년 전에 이 자리에 앉았던 그 누구 같고,또한 여러 천 년 후에 이곳에 앉았을 또 그 누구 같군요.이런 감정이 무었이겠습니까?
...한 만 년 후에 다시 오마.
문득 입에 떠오른 말입니다.이 말이 왜 이처럼 애달픈 것입니까.

형.
바다가 설레기 시작합니다.수평선 너머에 꺼뭇한 섬 그림자가 씻은 듯 그 모습을 감추고,해심에서부터 검푸른 물굽이가 기슭으로 밀려옵니다.

형.
돌을 한 개 집어,바다로 향해 던져버립니다.모든 사념을 그 돌이 상징하듯,그리고 돌아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주읍 용머리에서.


-고 박목월 시인/샘터-



*내가'나'아니며,여러 천 년 전에 이 자리에 앉았던 그 누구
같고,
또한 여러 천 년 후에 이곳에 앉았을 또 그누구 같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나란 존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일상 모든 것이 성가신 날에 되새김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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