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晩秋
이재호
2004.05.26
조회 144

학창시절부터 우리 줄(조)이 청소 당번이 되는 날이면 화장실 청소는 자청하여 모두 내 차지였었고 어려운 일이나 남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여왔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시 장기자랑 하려면 서로 누가 먼저 하기를 기다리며 쭈뼛거릴 때면 의례
나는 , 자청하여 흥 돋우기에 테이프를 먼저 끊었었다.

고등학교 축구선수를 하여 오면서 동료애와 진한 義理를 배웠고 팀웍을 이루는 일에 익숙하여졌다.

운동 이나 축구는 나 혼자면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눈빛으로 쌓아 온 동료애와 전술로 끝까지 싸우는 정신력이 강하면 상대를 언제나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여름 방학 농촌에 일이 많아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와 팀에 합류 할 수 없을 때면 선후배 들이 몰려와 같이 김을 매고는 나를 데려가서 함께 합숙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60년대 즈음에 천안이라는 작은 도시는 모두 한집안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병원에서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나를 돌팔이 의사로 만들어 이곳저곳 주사를 놓아 달라고 하였으며 나 또한 그렇게 해야만 했다.

물론 공짜였고 왜 그렇게 혈관 주사를 잘 놓았는지 나도 모를 지경으로 나는 잘 나가는 돌팔이가 되었다.

어릴 때 나의 꿈은 고아원을 경영하는 것 이였는데 3 만평의 거대한 농장에 고아원을 짓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보살피는 막연한 망상에 사로 잡혀 살아왔다.


하지만
그 땅은 아버지와 맏형의 농간으로 인해 한 뼘의 내 몫마저도 막걸리 안주 삼아 천안 모 다방의 마담 치마폭으로 모두 한 입에 털어 넣게 되고 대신 사생아가 하나 남겨졌다.

모 다방의 마담이라고 하는 여자는 그 후 돈 많은 사내 사냥감을 찾아 떠나버렸다.

차남으로
비참하게 태어난 덕택으로 장남은 논 팔아 서울로 장사를 핑게 삼아 시집 살이 에서 도망 가버린후

아내는 19 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밑 며누리 같이 나는 군에 가고 소 처럼 식모 처럼 10여 년 간 시집살이 를 뼈 빠지게 하였다

10 년후 살림을 나는데 단칸방의 셋집도 농협으로부터 융자를 얻고, 달랑 밥상 하나 숟가락 7개가 전 재산인 초라한 살림으로 분가를 하였고, 나는 보건소 임시직 공무원을 시작으로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
위로 딸 셌에 막내인 두 사내아이 까지 모두 일곱 식구인 내게 배운 기술이란 오직 醫術 뿐이었다.

보건소 근무 덕에 환자는 문전 성시를 이룰 정도로 나를 돌팔이 의사로 내몰았다.

돈 없으면 무료로 치료하여 주고 郡守를 비롯하여 높으신 분들도 병원보다는
보건소에서 나에게 진료하고 처방 받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돌팔이 醫師를 면하기 위해 獨學으로 공부는 열심히 하였으나 醫師 될 길인 국가검정고시 의사제도가 醫大가 增設 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根本的으로 사라지게 되어 醫師가 되는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絶望과 후회.

왜 대학진학을 포기하였었던가?

왜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에만 몰두하지 못하고 무엇을 얻으려고 방황하고 헤매었던가?

얼마 후 의료인 X-RAY 기사 면허증 등 임상병리기사 국가 시험이 실시되어 3 년간 의 수습 경력으로 다시 시간을 보낸 후 (검정3년 후)
1973년 방사선기사 국가 시험에 전문보건대학을 나온 젊은 후배들과 같이 응시하였다.
당시 전국 유일한 보건전문대생 45명이 졸업, 응시하여 20명 합격하는 중에 검정시험으로 면허를 취득하여 그 면허증 중 한 장이 인생의 밥 그릇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돌팔이는 면하게 되어 보건소에 계속 근무를 하였으나 보건소 예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면허가 있으나 없으나
똑같은 임시직에 같은 월급 월초에 임명하고 연말에는 모가지 자르고 를 6년 만에 돈의 유혹에 어쩔 수 없이 보건소를 떠나 급여를 더 받는 일반 개인의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 일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밤새워 수술을 같이 하여야 하고 X-RAY를 촬영하여야 하며 환자에게 24시간 눈을 돌릴 수 없는 병원생활이

거기다가 병원 마누라 돈에 눈이 어두워 환자에게 박아지 씨우기
심지어 죽은 자동차 환자 에게 자보 과잉 청구 를 강요에 XX 못할년 욕 을 하고 는 보 따리 싸 가지고

2년 만에 다시 서울시 보건소로 이직 하여 공직생활을 하면서 인간 다운 생활 을 할수 있는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병원 출신의 이력은
그 해 다시 나를 육영수 여사 의 하사 의료 시혜인
강남 시립종합병원으로 차출 되여 다시 병원 의료 진으로 환자와 함께 하는 평생 직업은 그렇게 이어졌다.

이곳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이나 나를 아는 수 많은 환자들 민원인 들 의 어려운 일들을 도와 주기를 서슴없이 하여왔다.

정말 모가지를 내놓고 하여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도움을 준 그들이 얼마 후
더 나은 곳
더 높은 곳에서 내 덕에 모두 일 잘하고 있다고 찾아 줄 때는.....
도와 주는 기쁨을 만끽 할수 있다


지금 한국의 대표적인 암 관련 병원 핵 의학실에 근무하고 있는 박 모 제자이자 후배는 처음 엔 친척으로 하여금 나에게 소개되었을

당시 병원 방사선과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밥이나 먹여나 주면서 기술이나 가르쳐 달라고 나에게 떠 맡겨 졌다.

충남 공주에서
농업 고등학교를 나온 그 아이는 공무원 시험도 응시하였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불운의 농촌 실업자였다.

군대는 면제된
그를 거두어 병원 심부름을 시키면서 직장이라고 좋아 할때 그대로 두면 결국엔 돌팔이라는
나의 전철을 겉게 되여 앞날의 비젼은 없는것 을 알고

나의 전철을 다시 밟게 할 수 없어
그를 신생 보건전문대에 보내기로 결심하고 새로 신설된 인천의 모 간호대학부설방사선과를 지원게 하여 당당히 합격시키였다

주간 에는 학교 에서 학업을
야간에는 병원 근무하게 하여 봉급과 야간 수당을 주어
학비에 보태어 학업 을 계속하여

그는 졸업과 동시에 나와 업무적 관련되어 있던 암 병원에 조건부로 발령을 받는 행운아가 되었다.

그 조건부란 자격 (면허)시험에 합격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그의 합격을 확신하였다.

실제 기술인 촬영술을 먼저 실무 로 환자를 격어보는 세월이 2. 3 년 익혔고

다음 은 학교 에서 이론으로 다져진 실력이었기에 국가 자격 시험은 하나의 요식 행위였을 뿐이었으니까,
그의 합격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배 는 한국 제일의 이고 그당시는 유일한 암병원 에 면허 취득 후 지금까지 순탄하게
직장 동료 와 장가 도 가고 50대가 되여 가는 그 제자는 지금도 공능동 원자력 병원에서 근무에 여념이 없다.

아직도 나는 나 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내 주머니를 털어야 만이 직성 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아직도 내게는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이 있어
태양이 다시 뜨고,
이 따사로운 실록의 계절에 내 삶에 곡식을 거두는 것 같이

晩秋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가 보다.

용인 구성읍
이재호
***-****-****

추신: 이글은 인터넷 상에 칼람에 실렸던 글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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