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장갑끼고 컴하는 아내
황성국
2005.01.04
조회 42
3년전인가 4년전인가 확실히 기억은 안 납니다. 숫자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제 집사람은 몸은 안 움직여도 눈은 뭔가를 계속 읽든지 보든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묘한 버릇이 있답니다.
그래서 넓지 않은 우리 집 안 곳곳에 책이나 잡지, 신문이 늘 스탠바이 상태로
주인의 손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집사람이 뭐 형이상학적인 전문서적이나 교양도서를 보는 것 같진 않구요.
어린 시절 한창 읽고 싶은 욕구가 강렬할 때 집안 형편상 책 한 권 맘 편히 사서
읽어보질 못해서 책에 대해서 한이 맺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부부싸움할 때도
논리적으로 구구절절 잘 알아먹지도 못할 용어를 써가며 열변을 토하니
KO패는 늘 제 몫이지요.
집사람은 다른 집에 가도 대형가전제품이나 잘 꾸며진 실내장식 또는
잘 가꾼 화초에도 도통 관심이 없고 책장에 책이 얼마나 많은지에만
관심이 많더군요.

그러던 집사람이 컴퓨터를 들여놓자 그만 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책엔 도통 관심이 없고 어느 땐 퇴근하고 오는 남편얼굴도
안 보이는지 한참 있다 "뭐 하고 있어? 아 밥 안 줄거시여!"라고 고함을 치면
그때서야 "움마 당신 언제 왔어?" 라고 할만큼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게다가 한 동안은 집안에서 뭐 그리 탄 냄새가 진동을 하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빨래며 행주며 주전자며 컴 앞에 앉아서 신선놀음 하다가
품목도 다양하게 여러 가지도 태워먹었더군요.
그러던 어느 여름에 마누라는 눈이 아프다며 안과엘 다녀왔는데
안대를 하고 왔습니다. 그 당시 유행하는 눈병에 걸린 겁니다.
전 솔직히 집사람 눈병보다 애들에게 옮을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당신 말이여. 정신이 온전하다면 물론 컴을 안 하겠지만
설마 온 식구들 다 쓰는 마우스잡고 컴 앞에 앉진 않겄제? 만약에 애들한테 눈병
옮으면 가만 두지 않을것이여!" 저는 오랜만에 가장으로서 위엄있게 경고를 했습니다.
집사람은 무지 억울하다는 듯 "눈물나고 눈이 아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컴을 하냐고? 당신은 마누라가 눈병 걸렸는데 얼마냐 아프냐고 걱정은 안 해주고 그렇게 섭
하게 협박만 할수 있어?"라며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며칠동안 집사람은 눈병 걸린 사람답게 눈에 휴식시간을 듬뿍 주는
생활을 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다 나아가던 눈이 고이 떠나긴 싫었는지
반대편 눈까지 눈병을 옮겨주고 갔습니다. 이쯤 되자 집사람은
담배나 술을 끊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듯 했습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대다가 동문서답을 하고 또 이유없이 짜증도 잘 냈습니다.
아이들이나 내가 인터넷을 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모르는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될것이고, 아 스포츠뉴스는 테레비에선
안 하나?"라며 노골적으로 치사하고 졸렬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을 자다가 전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킥킥웃는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요상한 신음소리 같기도 한 뭐라 설명하기 곤란한
그런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 왔습니다.
살금살금 나와보니 캄캄한 거실에서 참으로 기괴한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그 야심한 시각에 컴퓨터 앞에서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처럼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컴 삼매경에 빠져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스케치하면 더 가관이지요. 한 쪽 눈엔 안대를 하고 안경을 꼈습니다.
눈이 잘 안 떠지니 얼굴은 앞으로 쭉 내밀고 고개는 한껏 뒤로 제쳤습니다.
거기다 약간 나사가 좀 풀린 사람마냥 입을 헤 벌리고 있더군요.
그나마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오른쪽 마우스 잡는 손엔 하이얀 면 장갑이
껴져 있었습니다. 내 기척에 놀란 집사람 하는 말이 더 기가 막히더군요.
"걱정마! 요렇게 장갑끼고 마우스 만지니까 눈병 걱정은 붙들어 매드라고잉."

지금은 인터넷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알았는지 그렇게 컴에 집착을
안 하고 다시 책과 친해져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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