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민이를 생각하면꼭 거짓말같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승민이는 제가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제가 낳은 것처럼 여기면서기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막상 언니의 주검앞에서 맞닥뜨려진 육아의 책임감~
언니가 두고간 생명~
그 생명이 우리 집에 왔을 적에는 처음 먹었던 마음과는 달리 비겁하게도 막막했습니다
남편은 실직을 했고 제 아이는 뇌수막염으로 생사를 오가는 기로에 서 있었기에 적잖은 심적 부담감이 있었습니다.9월 25일~
그 날을 잊지 못했고 승민이를 남편과의 상의하에 시설에 맡기고자 업고 나왔던 그 날~~~~
저는 정말 언니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값은 제가 다 받을 것이라고몇번씩 되뇌였습니다
자즈러질듯 울어대는 승민이~~~
기저귀와 먹을 거리를 담은 박스를 놓고 오는데
언니가 사정없이 제 자리를 잡아당기는 환상을 봤습니다.
가슴 속에선 두개의 방망이로 막 가슴을 뚜드려대는 듯 아파왔습니다.
썰썰한 가을 바람이 불어와 어둑어둑한 고아원의 길을 을씨년 스럽게 만들고 있엇습니다.
'그냥 잠시~ 잠시만 맡기는 거야 난 도로 아이를 찾으러 올 것이야~~~~"
라고 위로를 하면서 힘껏 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잠시가 아니었습니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승민이를 찾아가질 못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풀리지 않는 운명처럼 우리는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을 잃고 아이는 사고를 만나 다치고~~~
이렇게 불공평 할 수가 있는가..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 때~
문득 가슴을 쥐어파는 듯한 깨달음이 있었으니
시설에 두고온 승민이였습니다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을 무리하게 떼어놓고 왔기에 혹여 이런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막상 우리 아이였다면 이렇게 매몰차게 떼어놓고 올 수가 있었을까
그게 아니엇습니다
가족였다면 살아도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으리라 라는 심정으로 같이 했을텐데..
저는 혼자 시설로갔습니다.
그때 그 날처럼 을씨년 스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저는 승민이를 제 품에 안을 수가 있었습니다.
승민이는 너무도 많이 커 있었습니다.
기저귀차고 있었던 녀석인데의젓하게 자라 인사를 꾸벅하는 다섯살바기 아이로 자라 있었고그 모습은 더욱더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어려워도 같이 했습니다.
죽을 먹어도 같이 했습니다.
학원에도 똑같이 못 보냈습니다.그래도 든든했습니다 이제서야 언니 볼 낯이 서겠구나 같이 가난해도 든든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방임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여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자유스럽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그리고 승민이는 스스로 스무 살이 되면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가을 10월의 어느날 호주로 유학을 갔습니다.
벌써 4년째가 되었습니다.
가을날 와서 가을날 떠난 우리 승민이~~~~
가슴으로 길렀던 승민이가 유창하게 영어실력을 다져서 돌아와줄 날만을 기다립니다.
비록 남들처럼 귀하게 키우지는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풍요롭게 해주고자 기도하면서 길렀습니다.
그 날의 기쁨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시 찾았던 시설안의 승민이
가슴을 길렀던 승민이를 다시 만났던 그 날을
용서받듯
사랑으로 기른 승민의 앞날에 축복있기를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