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정리정돈이 덜 된 집을 모처럼 시간이 나서 방구석에 있는 박스들을 풀어 물건을 정리하는 가운데 박스 맨 밑에 오래된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앨범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인 빛바랜 사진들로 가득하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는 어린 시절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옛 추억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 가운데 아주 오래전 설날 아침으로 기억되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나왔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두 분. 어린 시절을 조부모 슬하에서 보냈던 그 시절과 사진 속 그 때의 설날 추억이 떠올랐고 너무나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소복이 쌓인 눈으로 지붕위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로 그려질 때 쯤, 할머니는 허리 끈을 단단히 묶고 설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셨다. 채반에 올려놓은 전들의 냄새로 코가 간질간질하여 군침을 꿀꺽 삼키며 그곳을 맴도는 어린 나에게 할머니는 포근한 미소로 먹고 싶은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그러다가 계속 먹고 싶어 보채면 “아~ ”한 입 주는 할머니의 손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애틋한 손자사랑을 느끼게 했던 그 설날의 추억은 지금도 가슴을 저리게 하며, 할머니에 대한 보고픔으로 눈물 글썽이게 만든다.
부엌의 부뚜막 위 채반에 빨간 실고추를 얹은 굴비와 고기, 돼지기름으로 부쳐진 갖가지 지짐이들은 설날의 추억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먹을거리였고, 설날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정겨운 냄새이고 정경이었다. 절구통에서 찧어대는 인절미의 졸깃함, 갓 빼어 낸 가래떡의 한 입 오물거림은 지금 세상의 어떤 맛으로 바꿀 수 없는 하나 뿐인 맛이었다. 하루 종일 군불을 지피며 솟아오르는 연기 속에서 여느 때에 맛볼 수 없는 갖가지 음식들과 냄새는 어릴 적 동심을 들뜨게 하는 기쁨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때에는 시절이 시절인지라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에서 설날만큼은 넉넉히 꽉 차 보이고, 아름다운 풍경은 없었다.
그리고 달아져 구멍 난 운동화를 바꾸어 신는 기쁨, 오래되어 꿰매 입던 옷들도 그 날만은 새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부푼 기대는 설날 전날 밤을 잠 못 들게 만들곤 하였다. 하루 종일 먹을 것에 흥이 나고 새옷과 새신을 기대하며 들떠있던 그 때가 무척 그립다.
설날이 밝으면, 설빔으로 멋지게 차려입은 나는 설레는 마음을 짓누를 수 없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마주하고 방에서 줄지어 세배하면 방석 밑에서 세뱃돈을 쥐어 주시던 할아버지의 후덕함은 설날이면 잊혀 질 수 없는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었다. 정겨운 할아버지의 덕담과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는 지금도 가슴깊이 그리움으로 자리 잡혀 있는 애틋한 추억이다.
할머니께서 온종일 장만한 갖가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후, 동네 어귀로 달려 나간다. 이웃의 어르신과 일가친척들을 뵙고 무병장수의 세배를 드리면 손에 쥐어 주시는 세배 돈을 움켜쥐고 가게로 달려가 먹고 싶은 과자를 한 아름 안고 들판으로 향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연을 만들어 언덕위에서 뛰어다니며 연싸움을 하고, 눈밭에서 뒹굴며 팽이를 치는 즐거움은 설날의 동심에는 그지없는 기쁨이었다.
하루 종일 기쁨 속에서 달려 다니다가, 이윽고 설날의 해가 저물어 갈 때면 못내 붙잡고 싶은 어린 시절의 마음에 아쉬움이 너무나도 강하게 남았었다. 1년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었던 산해진미들과 떡국의 감칠맛을 못내 아쉬워하며 설날이 가는 것을 슬퍼했던 그 시절의 설날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설날의 추억은 1년에 한 번 실컷 먹고 1년에 한 번 학수고대하던 꿈같은 기다림의 추억으로 남아있는 아름다움의 극치 그 자체였다.
요즘 어른이 되어 살아가면서, 설날에 즈음하여 회상하는 어릴 적 설날의 추억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매우 소중한 것이며,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정성어리고 사랑스럽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만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도로 발달하는 문명사회에서 살기 바쁜 세상이라고 하지만, 세파속의 파고를 넘어 한번 쯤 여유롭고 풍요로운 설날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을 사는 어린아이들에게 내가 경험했던 설날의 모든 것들을 잠깐이라도 갖게 해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아름다운 선물은 없을 텐데......그렇게 설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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