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시계나 머리카락 팔아요~~~-
내 어릴 적 골목길에서 많이 듣던 정겨운 소리였다
시계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구멍 난 냄비도 때워 주고
고지대에는 지게로 물 배달도 해 주었다.
물론 소액이었지만 유료였다.
아마 지금으로 치면
지게로 퍼 나르는 먹는 샘물 배달인 셈이었다.
다들 특별히 밑천이 들지 않는 일거리였다.
북에서 내려와 일가친척 없는 우리 집은
이웃사촌이 친척이나 진배없었다.
옆집 철이 엄마는 그냥 털신을 사 주기는 객쩍어
우리 아들 주려고 샀는데
공부도 안하고 딱지치기만 해 미워서 너 줄 테니
너나 신어라!
하며 발목에 밤색 인조털이 달린 신도 사 주었다.
딱지치기는
그 집 아들과 나랑 제일 친하게 잘하던 것인데
왜 나만 사주었을까 생각하니 이제는 안다.
어린 내 맘 상하지 않게 해 주시려던
그 아줌마의 배려였음을......
그만큼 내 어릴 적에는
옆집 가서 밥얻어먹고
또 옆집 가서 곁 잠을 잘 정도로 서로가 막역했었다.
난 영희가 동네를 떠나던 날을 잊지 못한다.
하얀 목련이 뻥튀기처럼 풍성하게 나무에 매달리고
산수유 꽃이 앞 산 중턱에 연노랑으로 꽃물결 일렁일 때
영희는 그렇게 동네를 떠나갔다.
너무나 갑자기 동네를 떠나갔기에
잘 가란 말도 미처 못 하였다.
내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나와 같은 학년의 남자가 둘 여자 애도 둘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 넷은
공기놀이며 땅따먹기, 망까기, 사방치기 등
남녀구별 않고 많은 시간 놀았다
학원도 없었기에 공부에 대한 중압감도 없었고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기만 하면 되는
참살이의 전형이었다.
영희 아버지는 만물상이었다
영희 아버지의 리어카나 등짐가방에는
고장이 난 시계뿐 아니라 냄비며 술병, 고무신 등
없는 게 없었다.
우린 지금 재활용이라고 모으는 것이
그 당시 영희 아버지 직업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분이 재활용에 대해서는 선구자였으리라.
어떤 때는 리어카로,
어떤 때는 등짐으로 물건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다보니 영희 아버지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영희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우린 산 중턱에 있는 영희네 집에 자주 놀러갔다.
어른들이 안 계시기에 달고나를 해 먹어도 좋았고,
새순을 꺾어 손톱에 바르며
매니큐어라고 좋아하기도 했다.
영희 네 집 바로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었고,
그 개울에는 피라미도 살았고
돌 밑에는 가재도 살았었다.
우린 가재를 잡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으면
빨갛게 익어가는 가재의 향에
침을 흘리기도 했다.
지천에 널린 게 먹을거리요 볼거리였지만
그 당시 우린 그 자체가 자연의 고마움이란 것을 몰랐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었으니까
영희 아버지가 등짐으로
고장 난 시계나 머리카락 팔아요~~
를 외치면서 우리 동네 어귀로 들어왔다.
나도 뒤에서
나두~~
하다가 누런 이가 듬성듬성 빠져
웃음 띤 모습이 묘하게 보이는 영희 아버지에게
따라하지 말라고 몇 번 혼난 적도 있었다.
영희는 엄마가 안 계셨다.
처음부터 안 계신 것은 아니었지만
영희를 낳던 해 몸조리를 잘 못해서 돌아가셨다고했다.
물론 화장을 해서 찾아갈 무덤도 없었고
영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만 가슴에 새겨놓을 뿐
맘 아파할 할머니 때문에 밖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같은 동갑이면서도 영희는 참 조숙했던 것 같다.
그런 영희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죽음을 우리는 상여 나가는 걸로 봤다.
앞에서는 종을 울리고
가운데서는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우린 다시 그 상여 뒤를 쫒아 갔다.
할머니가 안 계시는 영희네 집은
영희가 열심히 치운다 해도 말이 아니었다.
우린 영희네 집에 놀러가도 편안함만 느꼈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희 네는 엄마가 안 계시는 탓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돌아가며
밑반찬을 자주 영희에게 갖다 주고는 했다.
그 심부름을 우리도 했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이 직접 해 주기도 하였다.
쯧 쯧-----어린 것이 고생도 많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물가에서 뭣을 하다가도 영희를 보면
어린 영희가 불쌍하다고 얘기들을 하곤 하였다.
우린 엄마가 있어서인지 뭐가 고생인지를 몰랐다.
지금처럼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물결이 앞 산 가득 일렁이던 날
영희는 울며 동네에 들어왔다.
옷가지 몇 벌 짐을 대충 싸며 우리에게
잘 있으란 말도 않은 채 동네를 떠났다.
우린 영희가 어디 놀러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낀 수심을
어린 우리들은 알 수 없었다.
엄마, 영희 어디 가는 거예요?
하고 엄마에게 묻자 엄마는 앞치마로 눈물을 닦으며
에고, 불쌍도 하지.
제 엄마 죽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신지 몇 년 됐다고
아비마저 가는지……
하면서 엄마는 영희가
서울 무슨 큰 병원으로 입원한 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하긴 며칠 동안 우리도
영희 아버지를 뵙질 못 하였었다.
그게 영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훗날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얘기는
영희 아버지께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간이 많이 상해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세상을 뜬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부인 죽고 엄마 죽고
어린 영희를 데리고 살 것이 막막해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명을 재촉했다며
영희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이고는 하였다.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로가 잊혀져가고 잊은 지금도
뻥튀기만큼 커다란 목련이 피어나고
연노랑 산수유가 꽃물결로 다가오는 봄이 오면
유난히 영희가 그리워진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