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 보고 싶어요
이인화
2008.04.01
조회 38
제가 81학번이니까 벌써 20여 년 전 일입니다. 고2 때 대통령 시해사건이 있었고 새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살벌하기만 했었지요. 대학만 들어가면 자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대학 정문 앞엔 늘 전경차가 서 있었고, 대학 안에도 영어잡지를 들고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일명 `짭새'가 늘 순찰을 했지요. 참 숨막히고 답답했습니다.
용감하게 시위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암울함에 젖어 있었답니다.

시대상황과 상관없이 미팅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보니 1학년이 지나가고 2학년이었습니다. 과 선배가 교지 편집일을 해 보자고 해서 2학년 땐 교지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편집원끼리 회의하고 취재하고 원고 청탁하고 설문지 만들어 조사하러 다니고...
교지편집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편집팀 화합 겸 겨울바다를 보러 설악산에 갔습니다. 거기서 제가 평생 다시 못 만날 운명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어린왕자처럼 다른 별에서 온 듯한 남자였습니다.
귀티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설악동에 앉아 구걸을 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는데, 저희 일행에게 사진을 찍어 준다고 하며 먼저 말을 걸었지요. 젊은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말을 하다 보니, 그 사람은 우리 대학 사진학과 재학생이었고, 겨울방학내내 산속에서 지내다가 상경하려고 버스비를 구걸한다고 했습니다. 키 크고 눈이 맑은 남자는 저희 일행 사진을 찍어 주며 자연스레 친해졌고, 서울에 와서는 사진을 받기 위해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받은 뒤에도 대화가 잘 통하던 저는 그 사람과 만나 영화도 보고 명동거리도 걸어다니고 남산 야경도 보며 데이트를 했습니다. 욕심 없고 순수한 그 남자는 산이 좋아 방학이면 산 속에서 지내다 속세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제 또래 남자들과 달리 음식점에선 문을 열어 먼저 들어가게 해 주고, 의자를 끌어서 여자를 앉히고, 길거리에선 차로 쪽에 자기가 서서 보호해 주었지요. 좋아하는 음악이 비슷했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몇 차례 만남으로 그를 운명의 남자로 생각할 무렵, 그 사람이 먼저 조심스레 자기에겐 여자가 있다고, 몸이 아픈 여자라 자기가 꼭 지켜 주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만날수록 정이 들어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요.

저를 전철역에 바래다 주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참 쓸쓸했습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속으로 수천, 수만 번 되뇌이며 집으로 돌아와 엉엉 울었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그리던 이상형 어린왕자를 만나 행복했는데,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한동안 정신 놓고 살았습니다. 3학년 초까지도 늘 춥고 우울하게 지냈지요. 캠퍼스에서 한번쯤 우연히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질 않더군요.

화장 안하고 맨얼굴로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다니던 20대에서 지금은 40대 후반 나이든 모습이지만, 우연히라도 한번 나이든 어린왕자와 재회하고 싶네요. 참 오랫동안 미치도록 그리워했노라고, 잊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노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그래도 제 우울한 20대 추억의 한 장을 아름답게 장시하게 해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는 말도요.

김범수의 `보고 싶다'도 듣고 싶어요. 미칠만큼 보고 싶었던 젊은 시절 회상하며...

인천 애청자가 보내요.

* 당첨된다면 [맘마미아]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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