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암울했던 나의 젊은 시절,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며 가슴을 적시는 조용필의 노래는 한 줄기 위안이자
탈출구였습니다.
사실 2년 전 10월 21일 인천에서 열린 “조용필 콘서트”에 큰 용기
(목발로 생활하는 저에게는 그런 곳은 일종의 도전이기에)를 내 참석한 경험이 충분한 감동으로 아직 남아 있기에 [부모님] 사연은 이리 한 번 내 마음을 표현해 보지 않으면 남은 삶에서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기에 적어보았는데 감사하게 티켓을 받아 토요일 일찍 가게를 닫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되도록 일찍 가고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이 민폐가 안 된다는 생활의 철학을 숙지한지라 주경기장 인근에 4시반 쯤
도착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날 야구경기가 열리는 날이라 100m 나가는데 30분도 더 걸리더군요.
입구마다 차량진입금지라고 인근의 탄천 주차장으로 가라며 들여보내지를 않더군요.
이동거리가 멀어지면 보행이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휠체어도 싣고 나왔지만 탄천에 세우고 그곳에서 휠체어를 밀어 중앙선을 완전 차단한 대로를 건너 오라는 것은 집으로 가라는 말과 같더군요. 어쩔 수 없이 차를 가지고 와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들어가보니 주차공간 엄청 남아돌더군요. 어떻게 얻은 기회이고 고맙게 받은 선물인데 이대로 철수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인근의 빈 공간에 불법 주차 했습니다. 각종 외제차와 대형차 사이에 짱 박아 두었죠. 물론 잘못한 것 인정합니다.
까이꺼 내 4만원 짜리 티켓 끊어도 내 감수한다는 배짱으로….장애인차를 견인이야 할라고…
입구에서 티켓을 수령하는데 어라 약속한 S석(10만원짜리)이 아니라
A석 (7만원짜리)이더군요.
지적을 하니 방송용 초청티켓은 스탠드를 뜻하는 S2석이라고….좋은
기분 상할까 봐 그냥 넘기고 들어갔는데 이 부분도 어째 좀 걸렸습니다.
2층스탠드라 좀 부담스러웠는데 역시 서울 시민들은 친절도
하시더군요. 어떤 신사분이 휠체어도 들어서 올려주시고….세 번째줄에 앉아야 하는데 어떤 아주머님들께서 그분들이 앉으시는 맨 앞줄과 바꾸어 주시고……과일을 나누어 주시는 옆 의자의 아주머니……큰 소리로 흥을 돋구시는 뒷줄의 아저씨…..휠체어를 내려 주시던 박수 열심히 치시는 환한 아주머니…..모두가 좋으신 분들이더군요.
이런 착하고 밝으신 분들의 사랑을 받는 조용필씨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밀듯이 몰려드는 5만여 명의 청중에게서 조용필의 힘을 느끼며 8시
반경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좌중을 압도하는 강한 파워풀 다이나믹 사운드를 내며 표범 2마리가
등장하더군요. 늘 동경하는 킬리만제로 함께 가자는 눈빛을 강렬히 뿜으며 녀석들은 그 험난한 바위산을 오르더군요.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이윽고 정상에서 포효하는 녀석의 모습에서 고난과 역경의 음악인생을 극복하고 그 고독함 속에서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조용필이 비쳐짐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 역시 그런 표범의 삶을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며….
초대형 화면과 버금가는 두 개의 스크린이 좌우 스테레오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고, 거의 지붕까지 놀라가 있는 조명기둥에서는 강렬한 퍼플색, 크롬색, 블루를 내뿜으며 쉴새 없이 빛을 포효하고, CG로 장식되는 배경화면은 21세기 무대예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블록버스터 SF영화였습니다.
그의 노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표현하는 익숙한 노래로 청중을 몰아갔습니다.
그의 음악 안에서 위안과 희망을 노래한 팬들은 야광봉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하였습니다.
21세기도 그를 원한다는 현수막은 그냥 걸어둔 장식은 아니었습니다.
40년 동안 사랑과 눈물을 노래했지만 여러분이 있어 행복하다는 멘트에 이은 “기도하는 ~”에 거의 모두가 “꺅, 오빠”였습니다.
잠깐 사진을 찍고자 한눈을 파는 사이 무대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관중과 하나 되는 무대가 연출되었습니다. 제가 조용필 노래를 알게 된
“lean on me”의 번안곡인 “님이여”와 “당신의 눈 속에 내가 있고~”라는 “돌아오지 않는 강”이 그의 최초의 라디오 주제곡이었음도 말하더군요.
이후 젊은 분들 뿐만 아니라 연세 드신 선배님들을 배려함이 역력한
노래방식의 가사가 화면 하단을 장식하며 “산장의 여인”, “친구여” 등이 이어지더군요.
“여기 오신 분들과 노래방을 같이 가면 평생 걸려도 안된다.”는 멘트와 함께 하나되는 무대가 이어지고 하늘에서는 불꽃 놀이가 이어졌습니다.
너무 많은 관중 때문에 피날레를 보지 못하고 앞서 나오는 사이로 울려 퍼지는 운동장 밖의 그의 음성은 안과는 다른 목소리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온 아들녀석이 “여행을 떠나요”, “미지의 세계”, “킬리만제로의 표범”으로 마무리 되었다고하더군요.
50주년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며 몇 가지 음반과 기념품을 사가지고 나오는데….
아! 차를 견인해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바로 옆의 외제차와 대형차는 그대로 있는데 만만한 15년생 내 애마
세피아차만….
내가 범칙금은 감수를 하고 들어갔지만 설마 “장애인 차량”을 가져갈 야박함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운전 15년 하고 우리 동네에서 “주차 위반” 몇 번 걸려도 차를 가지고 가는 황당함은 겪어보지 못했는데…….위반 스티커만 발부하면 되지 몰인정한 넘 같으니….
더구나 견인 장소는 성남하고 남한산성 가는 곳에 가져다 놓았고…..
경찰에 도움을 청해 보았습니다. 자기들은 지금 교통 정리에 정신이
없으니 댁이 알아서 택시 타고 가서 찾아야 한다고… 자기들이 택시잡아 줄 테니 택시 타고 가라고……
솔직히 그 시간에 휠체어 탄 사람을 그 곳까지 데려다 줄 기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112 세 번 걸고, 119도 걸고, 장애인 콜택시도 걸어보았지만 도움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119분은 그것은 개인의 사정이므로 119로는 모셔다 드릴 수 없다며 정중히 말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경찰이 그 잘난 공권력으로 잡은 택시 기사는 거길 누가 가냐며 당당히 가더군요.
순찰대에서 걸려온 전화는 주변에 경찰 없냐고…바꾸어 보라고….
제 앞의 경찰은 “아저씨 차. 내가 견인 했냐고… 나에게 이리 화내지 말라고….”하더니 가버리고….
어느덧 교통은 정리되고 친절하신 경찰관은 뭔 부탁을 하는 아줌마들(아마 견인?)을 친절히 경찰차로 인도해 가버리시고…..
다행이 어떤 정의의(?) 기사분이 견인소까지 데려다 주어 카드로 견인료 내고 차를 찾았습니다.
아빠가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으니 먼저 전철 타고 떠나라는 아들녀석은 신도림에서 기차가 떨어졌다는 전화가 오고…..
견인소 가는 길에 경찰도 전화가 오더군요.
“우리 나라 경찰보다 더 믿을 수 있는 택시 타고 차 찾으러 가니 신경 끊으라고.” 말했습니다.
다행이 초행의 서울 길을 네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아들을 태우고 돌아 오니 새벽 3시.
감동의 추억. 엄청 많이 쌓았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배려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인간들, 공권력 집행과 교통정리에 여념 없으신 우리나라 경찰보다는 지갑의 돈 몇 푼과 네비게이션 네가 훨 소중하다고.
그래도 마음씨 따뜻했던 좋은 서울 시민들 때문에 떨어진 “정내미”
주어 담고 오늘도 장사하러 나왔습니다.
벌금도 내야 되고, 대형차도 하나 사고 송파에 나도 아파트 하나
사야겠습니다.
영재님.
작가님.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 일생 일대의 “스펙타클”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생음악 전성시대”가 제일 가고 싶습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