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숙
2008.05.26
조회 15
안녕하세요?
저희 할머니께서는 26년 전에 여든 일곱살로 세상을 떠나셨지만, 할머니의 정갈한 손맛은 제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워낙 얌전하고 가정적인 분이라 그 모든 음식을 깔끔하게 하셔서 다 맛있었지만,특히 그 중에서도 제일 잘 하시고 지금은 그 어디에 가도 먹을 수 없는 '가죽 자반'이란 걸 소개하겠습니다.

저희 본가는 경남 진양군이었는데,이 가죽 나무라는 건 북방한계선이 있어서 아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에 해당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이 음식을 해 먹기 어렵고, 지금도 경동시장에 가면 가죽은 팔기에 사와서 고추장에 버무린 가죽 장아찌는 맛볼 수 있지만, 이 역시 가죽 나물값이 비싸서 자주 사 먹기엔 쉽지 않지요. 그래도 가죽만의 독특한 향기에 반해서 저희 큰오빠와 저는 김치 대신 가죽 고추장 장아찌만 먹고 살았으면 다른 소원이 없겠다고 한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가죽 자반>에 대해서 소개해볼까요.
우선 한 명은 고추가루, 후추, 마늘, 생강, 소금 등등 갖은 양념을 넣은 찹쌀풀을 마침 맞게 끓여서 대기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울타리 안의 가죽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서 잎사귀가 처지지 않게 잘 씻어서, 미리 준비한 매운 찹쌀풀로 여러번 옷을 입힌 후 시원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말려야 이 <가죽 자반>이라는 게 완성됩니다.

그런 뒤 꾸득꾸득 제대로 마르면 채반에 차곡차곡 가지런히 놓아두고 반찬을 해도 좋고, 술안주나 군것질로 먹어도 맛있어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가죽 자반에 참기름을 발라서 불에 톡톡 터질 때까지 구워서 바삭바삭 고소하게 먹어도 좋지요.

시골에서 할머니가 커다란 상자에 한 가득 해서 보내주시면 우리 어머니는 참기름 발라서 고소하게 구워 밥상에 내놓곤 하셨어요.
근데 우리 큰오빠와 저는 그것보다 약간 말랑하고 촉촉한 맛 그대로의 가죽 자반을 군것질로 먹는 걸 가장 즐겼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 이미 오빠는 고교생이라 학교에서 늦게 왔지요. 오빠는 등교하면서 꼭 제게 당부합니다.
"혼자 먹지 말고 오빠 오면 함께 먹자."
전 그러면 먹고 싶어 죽겠어도 벽시계를 보며 큰오빠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도시에서는 잎사귀가 다 쳐져서 장아찌나 만들지, 자반은 할 수 없다는 어머니 말씀에 이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추억의 음식 <가죽 자반>이었는데, 마침 이렇게 유가속에서 <맛>에 관한 이벤트를 하는 덕에 오랜만에 우리 할머니의 곱고 정갈했던 그 특유의 향기로운 음식 <가죽 자반>을 회상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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