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이 큰형부 생일인데, 네 언니는 뭐 하고 다닌다냐~!!”
제게는 여덟 살 많은 큰언니가 있습니다. 키도 170이 넘고 교복에 ‘선도’ 패찰이 붙은 언니가 하루 몇 대 안 다니던 마을 어귀 버스에서 내릴 때면 동네 아저씨들도 꼼짝 못하던 엄마에겐 큰 아들 같은 언니였습니다. 그런 언니가 밑으로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고 작은언니를 대도시 여고에 입학시키고 뒷바라지하던 끝에, 오빠도 저도 줄줄이 대처로 나오게 되었고, 때마다 돌아오던 학비며 생활비를 다 충당하였습니다.
그런 큰언니가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중학생이던 제게는 동경이요, 흠모의 존재였던 큰언니가 낯선 남자를 소개했는데, 저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습니다. 타고난 역마살로 도시를 떠돌던 아버지는 고봉까지 얹은 밥을 다 먹었다며 낯선 남자에게 합격점수를 후하게 주셨는데, 저는 당장 큰언니가 우리와 함께 살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큰언니의 신혼집에 가면 햇볕도 잘 들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사는 모습에서 ‘결혼’이란 것이 무언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되지 않아 큰언니는 큰조카를 안고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친정행을 감행했는데, 멀쩡한 직장을 다니던 큰 형부가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하루 만에 돌아가고, 형부는 세운상가 한 구석에서 조명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90년쯤, 얼마간 잘 유지되던 사업은 IMF의 강풍에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형부는 한 여름 붉은 꽃을 토해내는 배롱나무처럼 붉은 피를 토해내고 토해내도 좀처럼 꺾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업은 유지되었지만 피를 토하며 쓰러진 건 형부였지요... 결핵이었습니다.
수원에서 종로3가까지 지하철로 왕복 3시간이 넘는 시간을 출퇴근하며 가족을 건사하느라 정작 본인의 몸이 망가지는 건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큰언니는 형부를 위해 하계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사를 감행하였는데,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이별을 맛봐야 했습니다. 하계동은 수원에서 2시간 반이나 가야했기에 점점 우리의 발길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마음은 아련해지기만 했습니다.
3년 정도의 서울살림을 정리한 것은 큰언니의 병 때문이었습니다. 원인 모를 질병으로 큰언니는 관이라는 관은 모두 꽂고 입원해 있었습니다. 형부는 다시 수원에서 출퇴근하리라 선언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각혈을 하며 병원에 입원하는 일들이 반복되면서도 형부는 큰언니의 행복을 위해 수원에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 형부가 용돈을 주기 위해 알려준 고스톱을 이제는 가족스포츠로 즐기게 되었고, 작은형부나 제 남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 부모님께는 아들보다 귀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전등을 교체하는 것은 물론 막힌 변기며, 틀어진 문틀까지 깔끔히 수리하며 잠깐도 쉬지 않는 맥가이버 형부가 벌써 쉰 아홉의 고개를 넘고 있습니다.
젊은 날 가족을 위해 고생하느라 제대로 젊음을 누리지 못했던 큰언니는 문득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역마살을 이어받았는지 세상을 떠돌고 돌아옵니다. 형부도 그 마음을 알기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번 여행은 큰조카와 함께 떠나서 형부 혼자 맞이할 생일은 더없이 쓸쓸할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93.9와 함께 하는 형부가 93.9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박승화의 가요속으로’입니다. 특히 박승화씨가 통기타로 불러주시는 노래를 매일 기다리십니다. 쓸쓸하게 사무실을 지키고 계실 형부의 쉰 아홉, 생일날을 승화씨께서 축하해 주세요^^* 형부, 생신 정말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늙어요. 사랑합니다. 막내 올립니다.
신청곡 : 유해준, ‘나에게 그대만이’
추신 : 형부는 악기를 잘 다룹니다. 하지만 한 번도 악기를 사진 않았습니다. 조카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전자오르간을 샀을 때, 더 신나한 건 형부였습니다. 자신에겐 인색하고 다른 사람에겐 한없이 넉넉한 형부에게, 승화씨께서 기타를 선물해주시면 바쁘지만 지루한 사무실에서의 하루가 더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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