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아프셔도 자식들 걱정할까 싶어 한마디 말씀은 안하시는 엄마다.
그런 엄마가 이맘때쯤이면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아고 이제 우리딸 낳은 달이 다가 오나보다"하는 말씀을 하신다.
"아니 엄마는 나를 낳은게 벌써 몇십년 전인데 아직도 아퍼?"
"안아프다가도 너, 오빠들 낳은 달이 되면 몸이 쑤시지"
그래서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았을때
"아이를 낳을때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몸이 망가진다" 며 손하나 까딱 하지 못하게 하고
잘 먹이고 잘 쉴 수 있게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셨다.
2월과 3월 나와 큰오빠가 태어난 날이다.
엄마는 19살에 아빠를 만나셨고, 가진거 하나 없는 아빠를 엄마의 집에서는 반대를 했음에도 두분은 결혼을 하셨다.
그렇게 엄마는 없는 남자의 부인이 되었고, 며느리가 되었다.
엄마의 아빠 내게는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사하셨고,
엄마가 초등무렵일때 외할머니는 제혼을 하셨다.
외할머니의 새로운 출발에 짐이 될까 싶어 엄마는 엄마의 작은 아빠의 집에서 자랐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외할머니와 일체 왕래를 하지 않았다.
이모들보다 더 엄마를 챙기고 사랑해 주었던 작은할아버지와 할머니셨지만, 엄마의 손길과 비교가 될까?...
엄마의 결혼생활은 넉넉하지 못했고, 큰오빠 작은오빠의 산후조리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겨울에 태어난 나로인해 엄마는 우는 나를 업고 흐르는 찬물에 손을 불어가며 빨래를 하셨으니 온몸이 얼마나 아리고 아프셨을까?
내가 3살 무렵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로 가셨다.
엄마는 세아이를 혼자서 3년간을 키우셨다.
두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그런 엄마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이를 낳으면 가장 먼저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엄마에게 응석도 부리고 싶고
예쁜 내 아이를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고, 엄마도 나를 이렇게 낳으셨겠구나 싶어 눈물도 흐르고
그제서야 어른이 되어 간다.
우리 엄마는 그런 엄마를 찾지 못했을거고
엄마의 손길이 깃든 미역국 한그릇도 먹지 못했을 테니
손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지극정성을 나를 돌봐주셨지만 정작 엄마는
추운겨울 찬물에 손을 담그고 쪼그려 앉아 아궁이에 불을 때고 우는 나를 등에 업고 달래셨으니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픔을 몸이 기억하고 통증을 주니 엄마의 외로웠을 젊은시절을
말해주는거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엄마의 역할이 뭔지 엄마의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을 엄마임에도
참 성실이 오빠와 나 세아이를 잘 키워주셨다.
가끔
"엄마! 엄마는 할머니가 안보고 싶어?"
"뭘 이제 와서 보고 싶어"
(어린시절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T.T)
"할머니 어디 계신줄은 알어? 할머니 찾아가 볼까?"
라고 하면...
"응 어디 사신다고 하시더라, 다른 아이 낳아서 잘 살고 계시는데 뭘 이제와서 찾어"
평생 엄마!!! 라고 불러 보지도 못했을 엄마
엄마! 라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그 말을 불러 보지 못했을 우리 엄마
70이 다 되신 엄마는 아직도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있다.
엄마의 손톱은 닳고 달아 살점이 위로 나와 있다.
씩씩하게 자랐고, 성실이 결혼 생활을 하셨고, 무던하게 듬직하게 세아이를 키우셨지만
엄마도 모르는 사이 자리 잡은 그 외로움과 불안함의 크기가 너무 커서 생긴 습관
가끔 엄마가 손톱을 물어 뜯는 모습을 보면
"에이 엄만 애기야 아직도 손톱을 물어뜯게"
그럼 엄마는 씩 웃음을 보이시며 " 그러게 나도 모르게 자꾸 이렇게 물어 뜯네"
그러신다
그런 엄마를 난 꼭 안아 드린다.
엄마의 엄마의 빈자리를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그 외로움을 딸인 나로 인해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과 조금은 그 아픔이
치유되고 편안하시길 바래본다.
신청곡 엄마가 좋아하시는 장윤정의 "초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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