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도나우 강물 속에서 영면을 하신 분들과 가족 분들께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우리나라에 살면서 특정인들 빼면, 공연을 간다거나 사업 차 출장을 간다 하거나를 빼면 대다수 한국인은 상상만이라도 해외여행은 정말 꿈과 같은 일입니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우리도 해외여행을 꿈꾸었습니다.
우리도 이번에 사고가 난 동유럽 여행을 꿈꾸었는데 시간과 일정이 맞지 않아, 그리고 우리 부부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로 미리 중국으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누구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푸른 꿈을 꾸기 위한 떠남이요, 절대로 사고를 예견하고 떠나는 여행자 없지만 간혹 사고 뉴스가 나와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우리 부부도 중국 여행을 떠났다가 두 번이나 뉴스 탈 뻔한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그런 일에 직면을 했음에도 뉴스를 타지는 않았습니다.
호도협 티나객잔에서 백수대로 가는 험난한 길에서 중국의 촌로 한 명이 경운기를 몰고 가기에 빵차가 추월을 하려고 빵빵 대자 바로 길을 막는 바람에 일행 빵차 다섯 대가 추돌을 할 뻔했던 일과, 리장의 옥룡설산을 가기 위해 버스로 이동 중이다가 좌회전도 안 되는 곳에서 소형차가 좌회전 하려고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버스에 탄 일행이 다칠 뻔 했던 일들, 이 모두가 예견을 하지 못한 일임임에도 현지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음을 다시 한 번 기억을 하며 동유럽이 아닌 중국 서북지방의 여행을 간단히 소개해 보렵니다.
동양동문 산악회 5박6일 중국 호도협 트레킹 여행기
(대륙의 웅장함)
1일차
2019년 5월 4일 늦은 5시 30분, 인천국제공항 제 1 여객터미널 N출구 앞에서 가족동반을 포함한 동문 18명이 중국 호도협으로 출발하기 위해 모였다. 가이드의 도움으로 사천 행, 사천 항공 8시 35분 출국 비행기를 티켓팅 해 놓고 지연이 되어 9시 15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간식으로 햄버거를 먹거나 다른 것을 먹는 일행도 있었다.
날개 옆이라 엔진소리가 요란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늦은 10시에 기내식이라고 주는데 거친 빵과 사과주스, 카스텔라(젤리 같음)와 중국식 단무지, 견과류를 주는데 입에 맞지 않았다. 여전히 어둡고 시끄러웠다. 맥주와 와인을 서비스 해 주는 것은 좋았다. 창밖의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고, 땅에는 아즈카 문명의 그림처럼 불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가끔 난기류로 기체가 많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
한국과 시차가 1시간 차이가 나, (1시간 늦음) 23시 41분, 한국시간 5일 이른 00시 41분에 사천공항에 도착을 했다. 입국 수속을 하는데 더러울 정도로 까다로웠다. 남성으로서 부끄러울 정도로 여성의 검색을 받는데 손으로 그 곳까지 대는 등 수치심을 느낄 정도였는데, 항의를 하면 공안을 부를까봐 참았다. 비가 내렸다. 사천지방은 상해처럼 1년 중 해를 볼 수 있는 날은 두 달이 채 안된다고 한다.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사천 기차역 인근의 용지몽 호텔에 투숙을 했다. 말이 투숙이지 여강(麗江)으로 가는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잠시 머물 정도였다.
2일차
이른 6시 여강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른 3시30분, 용지몽 호텔을 출발해 4시, 사천공항에 도착을 했다. 출발 수속을 마치고 이른 6시, 여강으로 출발을 했다. 짐은 관광버스에 실어 놓고 호도협(虎渡峽)으로 출발을 했다. 호도협은 옥룡설산과 하바설산이 갈라진 사이의 협곡으로 물결이 무척 세며, 워낙 좁아 호랑이가 뛰어 넘을 정도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차 안에서 6위안짜리 옥수수도 사서 먹는데 현지에서는 제 철이라 하는데 일부에서는 덜 영글었다고도 했다. 저도(지역이름) 인근에서 빵 차로 환승을 했다. 이때 짐은 차에 놓고 차마고도 트레킹을 위해 간소하게 가방을 정리하고 나시객잔(納西客棧)으로 향했다. 빵 차 운전자가 여성임에도 워낙 난폭해 추락할 것 같았지만 다행이 일행 모두는 사고를 면했다.
나시객잔은 주변 소수민족인 나시 족이 운영하는 곳이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숙소가 있는 차마객잔(茶馬客棧)으로 향했다. 차마고도는 우리나라 둘레 길처럼 수 천 킬로미터로 여러 구간이 있는데 호도협 구간은 그 중 24구간에 속한다.
나시객잔(納西客棧)에서 먹은 점심은 밥과 감자 채 볶음, 양파양배추볶음에 견과류 볶음, 오이무침을 주는데 첫 현지 식임에도 입맛에 맞아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차마객잔(茶馬客棧)을 가는 길에는 28밴드가 있는데 28밴드는 고지대로 올라가기 위해 자동차가 직선으로 오르지 못 해 뱀처럼 죄 우로 왔다갔다 올라가는 길로 28번 왔다 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긴 곳도 있고, 몇 m 안 되는 짧은 곳도 있으며 28밴드 정상까지 오르니 우리가 상상하는 차마고도 길이 나왔다. 보통 우리나라 산에서 정상을 갈 때도 직선으로 오르면 힘이 드니까 장성 백양사 길처럼 좌우로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을 말한다.
그렇게 올라 우리는 차마객잔(茶馬客棧)에 도달을 해 여장을 풀었다. 맑은 날은 아니지만 더운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호도협 북쪽의 하바설산 루트로 옥룡설산 북쪽 면을 보며 걷는 것이었다.
가방을 풀고, 흘린 땀을 씻고 식당의 옥상에 올라 옥룡설산을 감상하며 만찬을 나누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인들과 함께 하니 이것이 힐~링이요, 이곳이 무릉도원이다. 저녁은 토종닭백숙이다. 고산의 닭이라도 백숙이니 부드럽기 그지없다. 주인장의 배려로 직접 배워 담갔다는 김치를 먹으니 선수 급은 아니지만 외국에서 먹는 음식이라 제법 맛있다. 여성분들은 김치가 녹았다는 표현을 했다. 객잔이라 2층의 걷는 소리며, 옆방의 수군대는 소리가 다 들린다. 하지만 전기에 더운물로 씻을 수 씻을 수 있고, 난방까지 되니 이 어지 행복하지 않으랴! 그렇게 2일차 밤을 보냈다.
3일차
2일차 차마객잔(茶馬客棧) 오는 길 보다 수월하고 훨씬 감동적이다. 중도객잔(中道客棧)에 다다랐다. 말 그대로 길의 가운데 위치한 객잔이다. 외국인도 제법 많다. 우린 이곳에도 스티커 한 장을 붙이고 인증사진도 찍었다. 경치들은 하나 같이 거대하고 위대하고 웅장하다. 계속 길을 걷자 저 아래 티나객잔이 보인다. 가는 길에 거대한 관음폭포라 부르는 폭포수도 떨어지는데 더움 가운데 시원한 물맛을 느끼게 해주니 이 또한 소확행이다. 이젠 내려가는 길이다. 내려가는 게 미끄러지는 돌길이라 더 힘들다. 어찌했든 지 티나객잔에 도착을 했다. 이곳은 국제유스호스텔이라고 간판이 붙어있다. 화장실은 깨끗하지만 문짝이 역시 없다. 점심 역시 중국식 백반이라 채소를 기름에 볶아 느끼하고 향신료 냄새가 강해 먹기 좀 버겁다. 외국인들은 밥 대신 맥주와 감자튀김으로 대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낮 12시 35분, 빵 차(식빵 모양으로 생긴 작은 승합차, 또는 중국식R/V)가 기다렸다가 우리를 백수대까지 태워다 주었다. 이 길은 좁고 험해서 관광버스가 다니기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달리니 V협곡 지역을 벗어났다. 돼지열병 때문에 곳곳에서 소독을 실시했다. 중국은 화장실 문화도 열악하지만, 교통정신 또한 열악했다. 마을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산길에 들어섰는데, 경운기 한 대가 우리의 운전을 방해를 해 정말 뉴스에 나올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부딪혔지만 빵 차 운전자들의 능숙한 운전 실력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백수대에 도착을 하니 늦은 2시이다.
가볍게 구경을 했다. 광고는 과한데 현실은 작고 공사 중인데 공사가 워낙 크다보니 대륙임을 다시 한 번 실감을 했다. 남자들이야 뒤돌아서서 볼일을 본다지만 여성들이 계시기에 인근 식당에서 화장실을 문의를 하니 쓰라고 한다. 고마워 할 찰라!
1원을 내라고 한다. 1원이면 우리 돈 180원 정도인데 난감하다. 100원짜리 밖에 없는데 다행이 가이드가 전액을 내 주었다. 관광을 마치고 다시 되돌아오는데 티나객잔을 늦은 5시에 지나가고 광광버스가 있는 곳에서 버스로 환승을 하고 티베트인 상그릴라로 출발을 했다. 저도까지는 건물이 청나라 식인데 몇 개의 큰 고개를 넘으니 집들이 티베트 식으로 확 달라졌다. 한창 공사 중인 상글릴라에 도착을 해 천극일광호텔에 투숙을 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오리털 파카가 필요할 정도로 기온이 낮았다. 늦은 호텔 식 저녁을 먹는데 하나 같이 그들의 주식인지 기름에 볶은 채소들이다. 물론 흰쌀밥은 주었는데 젓가락을 전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끈기가 없어 불면 날아갈 정도였다. 뭔가 2% 부족했다. 객실에서 2차를 했다.
4일차
호텔을 출발을 해 송찬불사라는 티베트불교의 최대 사찰에 갔다. 최대란 이름을 붙일 정도로 거대한 불상이 있고, 처음 안 사실이지만, 티베트 남자들은 우리나라 군대 가듯, 의무로 승려로 가서 의무기간이 끝나면 승려로 남거나 일반인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승려 기간 동안에는 출퇴근을 하는데 송찬림사 주변에 많은 건물들이 승려가 기거하는 집이며 모두 부모가 지어주거나 얻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근처에 있는 대불사로 갔다. 이 곳 역시 티베트불교의 성지로서 이곳은 최대의 종이 자랑이다. 주변에 고성이 있으며 상품을 파는데 관광지라 바가지를 많이 씌운다.
이른 11시 15분, 다시 빵 차를 타던 곳으로 되돌아 와 점심을 먹었다. 높은 언덕 몇 개를 넘는데도 상그릴라에서 호도협까지 두 시간은 금방이다. 그만큼 중국이 넓은 곳이다. 여강관광호텔로 돌아갔다. 늦은 4기다. 짐 정리를 하고 발 마사지를 받는다고 했다가 여독도 풀 겸 해서 전신마사지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받고나니 어느새 늦은 6시 50분이다. 한국식 삼겹살에 소주와 중국술도 마시고,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으니 그동안 느끼함이 사라졌다. 여강고성 야경관광을 나섰다. 동행하는 동문들은 이곳이 핫 플레이스로 서울의 홍대 정도라고 추측을 한다. 그만큼 젊음이 넘친다. 가이드가 맥주도 사고 부족분은 동문이 쾌척을 했다. 외국인 반주자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며 반주가 가능하냐 하니 가능하다고 해서 그들의 반주에 동문은 한국 노래를 불렀고, 반주자에게 약간의 팁도 주었다. 그렇게 4일차 밤도 지샜다.
5일차
옥룡설산에 가기 위해 여강관광호텔에서 출발을 하였다. 늘 그랬듯, 아침은 좀 부실한 듯싶을 정도로 먹을 게 없다. 빵 몇 개와 조각과일을 먹었다.
옥룡설산은 정확한 높이를 나는 모른다. 단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다시 걸어 올라간 4680m이고, 그 이상 최고가 5,596m라고 하지만 말로는 나시족의 영산이라 오를 수 없다는 것과, 석회암이라 등산을 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사실 공기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하산을 하고 야크 샤브샤브를 먹는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고산증세가 느껴져 제대로 맛있게 먹을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위에서 공연을 하는 인상여강쇼를 보았다. 옥룡설산 등정과 인상여강쇼가 패키지묶음으로 중국 돈 100원이니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18만원,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만큼 볼 가치는 있었다. 인상여강쇼는 장예모 감독이 만든 시리즈물로 여강의 최고 쇼라 할 수 있으며 평범한 지역 사람 500여 명을 차출을 해 한 달 이상 훈련을 시킨 것으로 소수민족의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것이다.
여강 쇼도 보고 이동을 한 곳은 동하고성이다. 여강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될 만큼 고성이 유난히 많은데 보존된 곳 보다는 수리를 하거나 재현내지는 복원을 한 곳이 많다는 것이다. 다시 숙소였던 여강관광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여강 비행장으로 출발을 했다. 사천공항에 도착을 하니 저녁 12시. 숙소인 사천기차역 옆의 용지몽호텔은 밤늦게 들어갈 운명인가 보다. 짐을 풀고 샤워도 하고 몇 몇 동문과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6일차
이른 아침 9시에 버스를 타고 지역 내의 사천성 무후사로 출발을 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름과 더불어 자호가 있었다. 관리가 되고 나면 직무 직위가 생겼다. 직급이 올라가면 황제의 작위 하사가 있었다. 직위가 어느 정도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들이 살았을 때의 업적과 인품, 덕에 따라 높고 낮음을 정해 시호를 하사했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 호는 와룡이었다. 촉한시기에 승상으로 활동했으며, 서기 223년 "무향후"의 직위를 하사 받았다. 서기 234년 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충무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무후”라고 불린 이유는 <시법>의 해설에 따르면 "위신봉상왈충(危身奉上曰忠)", "형민극복왈무(刑民克服曰武)", "집응팔방왈후(執應八方曰侯)"이기 때문이었다. 그 뜻은 제갈량이 위기 속에서도 한나라 황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나라와 법으로 백성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주장은 여러 곳에서 항상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갈량의 직위와 시호 등 모두 "무(武)"와 "후(侯)"자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를 "무후"라고 줄여 불렀으며 이에 그를 기념하는 사당도 무후사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곁에 있는 금리고성을 구경을 하고 개인적인 선물 자그마한 것 몇 개를 구입을 했다. 깎는 게 묘미라고 많이 깎고 깎아도 주었다.
점심을 약선 요리로 먹었는데 개구리 뒷다리 요리도 나왔다. 개구리 뒷다리라는 말에 동문 아들도 있었는데 청년임에도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사천공항으로 와 출국준비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늦은 4시다. 느낌으로는 사천에서 인천 가는 게 인천에서 사천으로 가는 것 보다 빠른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중국식 비빔밥을 주었다. 짜긴 했지만 맛있게 먹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을 하니 늦은 8시,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버스를 타니 늦은 9시10분, 집에 오니 짐도 안 풀었는데 10시 30분, 씻고 뭐 좀 하니 그냥 새벽 1시다. 되돌아보니 피곤하고 힘도 들도 먹는 게 고생도 했지만 얼마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의 최고의 여행으로 4월26일부터 5월 1일까지의 한중일러 크루즈와는 또 다른 여행이었고, 남에게는 권할 수 있는 여행이지만 나는 다시 가라하면 안 가겠다. 한 번 갔으니 그 돈으로 새로운 곳을 가 봐야 하니까.
지구는 넓고 가보고 싶은 곳은 수없이 많으니까.
무탈하게 여행을 마친 동문과 가족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전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도나우 강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과 그분들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심을 다시 한 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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