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기타 선물, 요청드립니다) 나의 기타 이야기
김현
2019.07.17
조회 209
안녕하세요? 마흔 중반의 직장인입니다.
평소 라디오를 자주 듣지는 못하지만 오후 4시 무렵 라디오를 들을 기회가
되면 언제나 박승화의 가요속으로를 듣고 있지요.
주말 나들이 길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꼭 듣게 되는데
저보다 집사람이 더 열심히 챙긴답니다.
6년 전까지 서울 살 때만 해도 제 차 라디오의 고정 채널이었는데
이 곳 광주에 오면서는 주파수가 잡히지 않아 레인보우를 통해 애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부터는 이 곳 광주에도 CBS 음악FM이 개국을 해서
아주 편안하게 듣고 있답니다.
평소 통기타 선물을 보내주시는 걸 알고 있어서 언제 한 번 사연을
보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방송을 들으면서 박승화님께서 “선물로 통기타를 보내드립니다.
통기타 선물을 원하시는 분은 사연 앞에 통기타, 라고 적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데 갑자기, 그동안 늘 미뤄왔는데 이번엔 꼭 보내봐야겠다, 는
생각이 불현듯 치솟더군요.
늘 좋은 선곡으로 추억과 위안을 주는 박승화님과 제작진께 감사드리며
사연을 보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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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기타를 손에 잡은 열일곱 무렵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 집 책장에 꽂혀있던 이정선기타교실로 기타를
시작한 이른바 “이정선키즈”입니다. 당시 같은 반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이 친구가 이정선기타교실을 펴놓고 이 곳 저 곡 연주를 보여주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기타를 참 잘 치던 친구였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연주했던 바로 이 노래를 듣는 순간,
기타를 배워서 이 곡을 꼭 연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당장 집으로 돌아와 한 구석에 먼지 쌓인 채 굴러다니던
형의 기타를 잡기 시작했답니다.
그 무렵 저는 친구들과 미팅을 통해 알게 된 한 여학생을
지독히 짝사랑하고 있었지요.
미팅 장소는 당시 제가 살던 곳에 있던 큰 동물원이었죠,
그 곳에서 일곱~여덟명 친구가 같은 수의 여학생들을 만나 웃고 떠들다가
한사람씩 짝꿍을 정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짝꿍이 되기 전부터 첫 눈에 반했던 그 친구가 정작 제 짝이 되고 보니까
얼굴만 새빨개지고 식은 땀만 줄줄 흐르는 게 정말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겠더군요.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수학여행 때 같은 반 여자아이들과
정말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았고,
남중ㆍ남고를 다닐 때도 하루 종일 웃고 떠드느라 저녁이면 목이 쉴 정도로
활발했던 저였는데 사춘기를 보내는 동안 성격이 변한 건지,
몇 년만에 만난 “이성” 앞에서 저는 정말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빨개져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모습을 본 여학생들이 제 별명을 “사과”라고 지어서 놀렸다는 얘기도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사과국민학교에 다니는 국민학생” 같다는 놀림이었지요.
다른 친구들은 군데군데 흩어져서 다들 재미있게 어울려
이야기 잘 하고 노는데 우리만 어색하게 있으려니까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답답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불쾌했겠지요.
그렇게 답답한 시간이 흐르던 어느 순간
이 친구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더군요. 제가 당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은 더 빨개지고.. 놀란 다른 여학생들이 달려오고..
이건 뭐 좋은 분위기는 저 때문에 다 깨지고..
그렇게 여학생들은 흩어지고 함께 온 친구들도 몇은 가고 몇은 남고
그렇게 참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동물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바로 이 노래,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 뿐”이라는 노래가
거짓말처럼 흘러 나왔습니다.
당시 길거리 어디에서나 곧잘 흘러나오던 노래였는데
그 날 들은 이 노래는, 가사가 정말 제 얘기였지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특히 “이대로 떠나가야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아무 말도 못 한" 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그렇게 노래 하나에 혼자만의 추억 하나가 오롯이 실리게 되었고,
한동안 이 아프고도 찌질한 추억을 홀로 되새기며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 집에서 기타 악보를 발견한 뒤에는
정말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이 곡을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노래를 거의 마스터하고 났을 무렵에는
지독한 짝사랑의 열병이 조금씩 가라앉더군요.
그 뒤로 3년쯤 지나 우연히 그 친구를 버스 안에서 먼 발치로 본 적이
있었는데 이웃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웃는 모습은 여전히 곱고 예뻤습니다.
사과는.. 끝내 못했습니다. 빨개진 제 얼굴로 “사과”를 보여줄 게 아니라
그 땐 그토록 숫기 없어서 미안했다는 “사과”를 해야했을 텐데 말이지요.
돌아놓고 보면 숫기 없어 말 한 마디 못하던 저나,
그런 저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다 울음을 터트리고 만 그 친구도
참 순수하고 풋풋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됐건 그렇게 그 친구를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고,
제 인생에 그녀 대신 기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할 무렵,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세운상가로 달려가 기타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20여년 가까이 함께 하고 있는 제 인생의 두 번째 기타는 제 삶이 기쁠 때,
팍팍할 때, 외로울 때 언제나 곁을 지켜 준 친구였고,
두 딸이 자라는 동안 뽀뽀뽀부터 뽀로로까지 온갖 동요를 함께 해준
동요선생님도 되어 주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금 우리 큰 딸이
사과같던 그 무렵의 제 나이와 같군요.
박승화의 가요속으로에서 기타를 보내주시면
중년을 맞는 제 인생의 세번째 기타로 친구삼아
또 한참의 시간을 온 가족이 함께 건너가 볼까 합니다.
신청곡은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 뿐”,
혹시 박승화님의 라이브로 부탁드린다면,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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