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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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포즈>아내와의 약속을 지킬려고 노력하는 못난 남편이
이기봉
2007.12.22
조회 134
저는 현역 군인입니다.
90년부터 92년까지 21사단 백두산 부대 GOP에서
근무했습니다.

한달에 한번 꼴로 근무지를 벗어나 인간세상으로
내려 와 일반사람들이 하는 재미난 일들을 1박2일
일정으로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실시하고 다시
근무지로 올라 갑니다.

고향에서 제 얼굴을 볼려고 올라 온 친구들과
열심히 먹고 마시고, 2차로 생음악이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꽤나 이름이 있어 당시 들국화와 전인권 등
유명 가수분들도 출연했습니다.

우리들도 얼큰하게 취해 즐겁게들 마심을 지속하고
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회만 보고 있는데, 그중 생머리를 한 아가씨가
성큼 성큼 무대위로 가더니 통키타를 잡고
노사연의 님그림자를 부르기 시작 했습니다.
저는 시세말로 한방에 갔더랬습니다.
윤희님! 그 기분 아시겠습니까? 뭐랄까
그 당시 저는 알았습니다. 제 가슴의 심장소리가
그렇게 큰줄을 말입니다. 어찌나 쿵쾅 거리던지
한곡이 끝날때까지 저의 시선은 무대 한쪽의 자그마한 아가씨에게
고정되어 멍~ 맞습니다. 그저 멍~하게

용기를 내어 대시를 했고, 운좋게 만남의 자리가 성사되어
재밌게 놀다가 헤어졌습니다.

저는 합석을 하면서 상호 정확한 나이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민증에 있는
주소지를 확인해 두었고,

저는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날이 밝자마자, 주소지상의 집을 찾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엌에서는 아침 준비를
하던 그녀의 어머니께서 나오셨고
저는 사귀는 남잔데 결혼하겠다며 딸을 주십사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황당하신 표정으로 한참을 제 얼굴을 쳐다보다가
일단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군요.

황당한 일이었지만 오늘중에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저로서는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쫓겨나지 않고 방까지 차지하고 앉았으니
일단은 성공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약 30여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다리다가 지난밤의 피곤함이 채가지시 않아서 그랬던지
쓰러져 자고 말았습니다.

얼마를 잤는지 깨어보니 이불이 덮혀 있었습니다.
저는 더욱 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한 잠 자고 나니 배도 고프고해서 앉아 있는데,
그녀의 어머님이 밥상을 차려서 그녀에게 보내 왔습니다.
상을 들고 들어오는 그녀가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저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는 어젯밤에 같이 밤을 보냈고
이제는 헤어질 수 없고, 군인이라 집과 직장도 있으니
딸을 굶기지 않을 자신도 있다며 결혼을 허락해 줄것을
간청 드렸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아버님도 군인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셨으며 6.25당시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으신 국가유공자 였음을 알았습니다.

어쨌든 아버님으로부터 이렇게 아침부터 소란을 떨지 말고
다음에 좋은 날 다시 한번 더 보자며 반승낙을 받고
헤어졌다. 그녀와 부모님들은 갑작스런 일로인해 당시
너무나 놀랬고, 제가 가고 난후 많이 혼났다고 합니다.

그후 아버님의 말씀대로 저는 좋은 날 정식으로 꽃과 선물 바구니을
들고 그녀의 집을 정중하게 방문하여 그때의 무례함을 빌고
결혼까지는 아니었지만 교제를 허락한다는 승낙을 얻었습니다.

약 1년반 정도 만나다가 눈이 시릴정도로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어느날 그녀의 집 앞에 큰 프래카드를 내 걸었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
프로프즈를 했습니다. 결국 결혼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양가 모두 형편이 좋지 못했습니다.
본가 어머니께서 간암으로 투병중이셨고,
장모께서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돌아 가셨고, 장인께서는 6.25때 입은 왼쪽다리 파편상이
심해지셔서 서울 보훈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셨습니다.

양가에선는 조금더 형편이 좋아지면 식을 올리라고 했으나
제가 92년 5월 서울로 발령이 나서 전출을 가야하기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생각에
큰 처형과 큰 동서되는 두분에게 사전 양해를 구하고

92년 5월 우리는 간단한 옷가방 3개와 수중에 2백 2십만원
그리고 서울행 좌석버스 2장을 갖고 서울행 야간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우리는 두 손을 꼭잡고 서울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니 막막했습니다. 일단 제 직장 근처에 월 12만원
삭월세 여관방에 짐을 풀었습니다.
집사람과 저는 그날밤 잠 들지 못하고 상의를 했습니다.
양가의 어른들 말을 어기고 함께 살기로 한 마당에 몸이 아프지
않는 한 우리들의 힘으로 열심히 살아서 빠른 시간내에
집도 사고 일어서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이아반지와 함께 결혼식을 올려
신혼여행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일찍 퇴근하여 2인용 밥통겸 밥솥, 수저 2모, 밥 그릇과
국그릇 2벌, 작은 교자상 하나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시장 보는 내내 속으로 결심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남들이 쳐다보지 않는 곳에 살지만, 반드시
자수성가하여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일가친척 초대하여
결혼식을 올리겠노라고 수차례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저는 전출 온 부대에 출근하고 아내는 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경기 인근 농아학교에 교사로 채용되어 우리들의 서울 맞벌이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으론 오래 가지 못함을 우리 두 사람이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서로간에 힘들고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이 없었고,
집이라고 오면 1.5평 작은 방에 덩치는 산 만한 남자가
한 여름에 살려니까 무척이나 힘 들었습니다.
집사람 또한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투닥거리던 것이 언젠가 부터는 자주 서로의 감정을
밖으로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집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하도 목청을 높여 싸우니
여관방 여주인 되시는 분이 하루는 아내에게
10만원 수표를 내밀며 '새댁 이것 같고 얼른 도망가서 새롭게
시작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아내는 왠지 모를 눈물이 나더라고 했습니다.
어렵게 서울 올라와서 비록 낮은 곳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하기에 늘 행복했었는데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들의 삶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내는 저한테 더 잘했고, 더 독하게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다니던 농아학교도 학생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만두고
새로운 소위 말해 돈 되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고 타락했다고 하지는 마십시요. 그래도 아내는 농아
학교에서 차비만 받고 약 12개월 군소리없이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살림살이 어렵던 시절 말입니다. 유치원에서 오라는
데가 많아도 말입니다. 참말로 착한 아내죠.)

어쨌든 아내는 서울 모 유치원 선생으로 다시 시작했고,
저는 과천쪽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생활 했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비록 어렵지만 어차피 가질 아이라면
빨리 아이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여관방에서 보증금 5백만원에 월 28만원짜리 단칸방으로
옮겼습니다. 작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여관방 보다는 행복했습니다.
퇴근때마다 다른 사람 눈치보지않고 집으로 들어가도 되니 말입니다.
여관방에 살때는 퇴근때 마다 젊은 남녀가 여관방으로 들어가니
이상스레 눈치가 보여졌습니다. 저보다는 아내가 더 힘들었을
겁니다.

이사한 집에서 첫째 사내아이를 낳고 서울에 일가친척 하나 없으니
제가 직접 아내의 수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출근하기전에 아내가
먹을 밥과 미역국을 끓이고 연탄불을 갈고 등등 그래도 행복했고
직장에 가면 힘이 났습니다. 집사람과 아이 얼굴을 보기위해
퇴근 후 술 약속없이 곧바로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귤을 한 봉지 사서 말입니다.

큰 애가 세살 되던해 보증금 3000만원에 삭월세 없는
반지하방으로 옮겼습니다. 삭월세 낼 돈으로 적금을 하나 더
들수 있다며 좋아하던 아내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저는 아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장농과 화장대를
선물했습니다. 제가 담배를 끊고 모은 돈에다 약간 보태서
장만한 선물이라 저는 더 뿌듯했습니다.
장농과 화장대가 배달되던 일요일 아내는 마치 아이를 쓰다듬듯이
만지고 앉아보고 그리고 내게 와서 고맙다고 하고 마치 소녀같이
좋아라 했습니다. 하하 (지금도 그 장농은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더 큰 장농을 살 생각을 아예 안했습니다. 몇번의 이사를 했지만,
한번도 버릴 생각을 서로가 안한 거죠. 우리 두 사람만 아는
행복이 묻어 있고,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이죠.)

당시에 저는 이대로만 살면 97년도에는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장인 어른께서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보훈병원 중환자실로 입원을 했습니다.
상태가 무척이나 안 좋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교대로 병원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간암 수술로 호전되었던 본가 모친이 이번에는 재발되어
중환자실로 들어 가셨습니다. 아내와 저는 상의 끝에 저는 서울에
남기로 했고 아내는 큰 애를 데리고 본가로 내려가 모친의 병 수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냈습니다.
아내는 점점 말라 갔습니다. 아내의 병 수발에도 모친은 회복하지
못하고 96년 초가을 세상을 버렸습니다.

다행히 저는 모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간 덕분에
임종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모친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저 '아가 미안하다. 아가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셨고
저에게는 '다투지 말고 의논해서 꼭 결혼식을 올려주라'고 다짐
하신 후 병실 천정을 한번 뚫어지게 노려보시곤 운명하셨습니다.

저와 아내는 상을 다 치러고 상경했습니다. 올라오자 마자 잠시
쉬면서 몸을 추스르라는 제 말도 안 듣고 곧바로 출근하는 똑순이
근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 장인 어른께서 97년 11월 보훈병원 중환자실에서 세상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아직 결혼할 시기가 아니라며 서로 위로했고 더 열심히
살았고 99년 8월 24일 둘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둘째가 복덩이인지 저와 아내가 하는 일이 순조롭게 술술 풀렸습니다.
아내는 유치원 교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아는 사람의 권유로 신촌과 홍대 포장마차에
김밥 납품하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모습이 안스러워서
'여보 집에서 아이만 키우고 어느정도 크면 그때 다시 유치원
나가라'고 했으나 아내는 잠시도 그럴틈이 없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할수 없었습니다.
주말이나 휴가때는 저도 아내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러던중 저에게 작은 기회가 왔습니다. 영어 자원을 선발하여
해외파병 갈 사람을 뽑는 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6개월 정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위험하다며 만류
했지만 그곳에 다녀 온 사람의 말로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며
안심시킨 후 2003년 7월, 4주간의 현지 적응 훈련을 받고
동년 8월 성남 비행장에서 특전사 요원들과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했습니다. 6개월간 떨어져 있으며 우리부부는 함께
살때 보다 더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통화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12월 집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집앞에서 젊은 남자 두명으로부터 쇠파이프로 왼쪽
어깨를 맞아 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습니다.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으로 갈 수도 없고
그저 걱정만 할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아내가 만든 김밥이 기존 자리를 잡고
있던 경쟁 김밥집과 이권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고 나기 전
부터 집 주변에 오토바이를 탄 젊은 남자 두명이 아내를 미행하고
집 주변을 기웃거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갖고 있던 돈은
그대로 두고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가면서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분명 경쟁자의 소행이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찰로 있는
아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경쟁 김밥집에
나가서 조사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퇴원후에도
제 말을 안듣고 계속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멀리서 어떻게 할수
없어 또다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저의 작은 임기응변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그 사람들이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내는 지금 이대로 그만두면 내 몸만 고생하고 그 사람들에게
지고 만다면 절대로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아내를 두지 않았습니까? 이정도니 그 사람들도
더이상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2004년 3월 1일 귀국했습니다.
비록 아내가 바빠서 마중은 못 나왔지만 저는 고국땅에 무사히
발을 딧는 순간 그동안의 마음 고생으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곧바로 택시를 타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제가 온다는 소식에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이 저희집에 잔뜩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갖고 온 선물을 돌리며 그동안 집사람을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빠짐없이 했습니다.
아이들도 많이들 컸더군요.

6개월간 전쟁터에서 열심히 근무하여 벌은 돈으로 먼저 아내에게
작은 가게와 새 오토바이를 선물했습니다. 아내는 너무나 좋아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선물을 하면서도 저는 이게 과연 잘
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또다시 사고가 날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 이후 사고는 없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저는 걱정이 많습니다. 아내가 일을 시작한 이후 생긴 버릇입니다.

그리고 2005년 3월, 꽃피는 춘삼월 저는 어머니 임종시 약속했고
아내와도 약속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오로지 저와 아내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내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기간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변분들의 도움도 많았습니다.
친구가 결혼 선물로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긴 캐딜락과 캐딜락
냉장고에 와인을 넣어 보내주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결혼 선물이 되었습니다.

신혼 여행은 집사람의 가게 때문에 2박 3일간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아내는 그때가 제일루 행복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있는 친구가
결혼 선물로 콘도와 차를 보내주고 마지막 날 저녁에 우리 부부를
위해 제주도에서만 맛볼수 있는 싱싱한 갈치회와 극장식 레스토랑
에서 즐거운 시간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더욱 더 금실이 좋아졌고, 믿음 또한 굳건해졌습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 부부의 공동이름으로 된 작은 집도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약 5년간 함께 살던 처 조카도 작년에 시집을 보냈습니다.

힘들었지만 우리 가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각자 맡은 바 일을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도 아내는 새벽 네시에 슬그머니 일어나 찬바람을 맞으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 가게로 나가 김밥을 말고 저녁 12시가
되어야만 퇴근합니다. 저는 최근에 아내에게 소형차라도 한대
사줄 생각을 하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고 친구에게도 부탁을
해 놓았습니다. 더이상 추위와 눈비를 맞지 않도록 해줄
생각입니다.

아내는 지금껏 장사를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쉬지않고 있습니다.
하루정도 쉬어라고 해도 납품받는 사람들이 물건을 기다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분명 아내도 힘들고
찬바람과 눈비를 맞으며 하는 것이 싫을 겁니다. 팽개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번 더 내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면 저는 더욱 더 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멍청한 남편이라 어떻게 해주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저 아내가 시키는 일만 할 뿐입니다.

얼마전에는 쇠파이프로 린치를 가한 경쟁자가 망하는 바람에
신촌과 홍대 그리고 다수의 곳에서 아내의 김밥만 받습니다.
이젠 아예 가게에서 새우잠을 자고 짬짬이 집으로 들어 옵니다.

아내는 여자이기를 포기했나 싶을 정도로 화장도 안하고 옷도
두껍고 따뜻한 옷만 입습니다. 분명 아내도 여느 여성들처럼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고 싶고 백화점 쥬얼리 코너도 가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사고도 싶을 겁니다.

아내는 참으로 오랜 기간 인내하고 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면 저 또한 함부로 살수가 없습니다.
아내는 저와 아이들의 거울입니다.
며칠전에는 그런 아내가 걱정이 되어 출근하면서 아내 얼굴이라도
볼 요량으로 가게로 갔다가 가게 유리창으로 김밥을 말다 앉은채로
졸고 있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저는 아내가 혹여 깰까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습니다.

윤희님! 아내는 키타도 치고 들국화, 전인권 등과도 한때 교분을
갖고 있을 정도로 노래를 사랑했던 소녀 였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제가 해 줄수있는 것은 가게에다 큰 앰프를 설치해서
하루종일 음악을 듣게 해 주었더니 어느날부턴가 CBS라디오만
고정해서 듣고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도 레인보우를 다운받아 아내에게 사연도 띄웠고
채택이 되어 방송도 탔습니다. 또 우리 아이들도 사연을 올려
방송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아내가 무척 좋아라 하더군요.

CBS는 우리 가족에게는 산타클로스와도 같은 존재 입니다.

저와 아내는 늘 말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남을 속이지 않고
바른길로 걸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 줄 겁니다. 엄마 아빠가 열심히 성실히
부지런히 거짓없이 비록 그 과정이 힘들고 난관도 많지만
참고 극복한다면 반드시 목표한 것을 이룰 수 있고 좋은
결과로 나타남을 말입니다.

두서없이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어 감사합니다.

추운 겨울 그리고 바쁜 연말연시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안녕히 계세요.

추신 : 주말이면 저는 쉬는 관계로 사연을 자주 올립니다.
부족한 글을 채택해 주고 선물도 보내주어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윤희님! 신혼여행 간 마지막 밤,
저는 아내에게 약속했습니다. 당신에게 약속한 것을 아직
못 지킨것이 있노라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더 약속했습니다. 아내는 괜찮다고 했지만
저는 아내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아니 고생하는 아내를 기쁘게 해 주고 싶습니다.
비록 아내의 손이 관리를 안해 트고 여자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못생겼지만, 그래도 저는 그런 아내의
손이 보배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여보! 조금만 참고 열심히 살자. 그런데 여보 나는 얼마전부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어. 열심히 살아서 어느정도 풍족해 졌을때
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때는 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 우리 몸도 돌보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건강해야 나중에
늙어서라도 당신과 손잡고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는 거야. 여보 사랑해요. 그리고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잔뜩하고 어떻게 미안해요. 내 더 잘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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