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읽지 않아 낡은 책들을
살구나무 아래 탑처럼 쌓아두었다
한때 내 영혼의 불쏘시개였던 것들
넝마가 되어 바람에 너덜거린다
한나절 지나도록 고물장수는 오지 않고
바람이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있다
무명無明의 시절 어두운 눈을 밝혀 주고
청춘의 밤을 뜨겁게 지새웠던,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 사이의 여백들
그 여백 사이에 누렇게 바랜 회한과 추억을
바람의 손가락이 짚어 가며 읽고 있다
너무 작아 눈이 아픈 글자들까지
낭랑한 소리로 읽어 내는 저 바람의 독서라니!
낙관주의자의 명랑한 목소릴 닮았다
그 소리에 고무鼓舞되었는지
공터에 만개한 불그레한 살구꽃들
허공에서 난분분 춤을 춘다
바람이 읽고 간 페이지마다
살그머니 꽃잎 책갈피를 꽂아 놓고서
김경윤 시인의 <바람의 독서>
나무 아래 쌓아둔 책의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 사이의 여백들로 바람이 듭니다.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냄새...
마음이 순해지는 봄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