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29 (수) 전기장판
저녁스케치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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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추위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부연 입김이 터져나오는 꿈이라도
따뜻하다 이방은 참 따뜻한 곳이다 알 수 있다
아버지도 나도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뜻하다 따로 또 같이
믿을 수 있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외출할 땐 꼭 끄고 나가셔야 해요 꼭이요 당부할 때마다 아버지는
알았다 좀처럼 대답하지 않고
피를 마르게 한다는데
온수매트를 사야 하나 얼마짜리를 사야 하나 이따금 고민도 하지만
지금은 버릴 수 없다 취한 바람이 창을 때리는 초저녁
금빛 장판 위에 쓰러지듯 누운 아버지는 어느덧 새근새근 잠이 들고
피를 마르게 한다는데
일부러 장판을 켜지 않은 날에는
무거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게 된다 죽은 척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처럼,
아버지도 나도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박소란 시인의 <전기장판>
바깥이야 어떻든 장판 위 이불 속에 있으면
그 어떤 추위도 견딜 수 있겠다 싶어져요.
마음도 그래요.
단 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뭐든 견뎌낼 수 있지요.
그래서 가족이 있나 봐요.
언제나 함께 세상에 맞서라고.
그러니까 우리,
누가 뭐래도 끄덕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