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을 하려는 이스라엘과 그것을 막는 문제의 핵심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들이 내가 원하는 곳에 가서 예배하라는 것이고
바로는 히브리 인들은 자기들의 노예이니
자기가 마음대로 내가 지정하는 곳에 가서 예배하라는 것이다.
즉 바로는 저들은 나의 종들이니 내말을 들어야지 구태여 그들을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곳까지 가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에 맞게 타협을 줘서
네 형편과 네 사정에 맞게 예배를 드리라는 바로의 말에
하나님의 고집은 어떤 경우에라도 예배만은
하나님이 지적하신 곳에 가서 하나님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바로의 생각에는 어디에서든지 다 예배를 드리면 된다고 생각을 한다.
애굽에는 나일강도 신이고 개구리도 신이고 심지어 파리까지 신이다.
그러니 구태여 삼일이나 걸어서 힘들게 예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백성을 내 자리에 와서 내게만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바로의 신앙관은 대게 오늘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이요,
부름 받지 못하고 소명 없는 자들의 신앙관의 형태이다.
정말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의 소명은 모세의 말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내 남편이니 아내이니 자식이니 하면서 내 가족이니
내가 마음대로 한다는 고집과 불순종의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더 나아가 믿음의 생활을 하여도
정확하게 하지 못하는 신앙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은 반드시 그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것을 방해하는 그 세력에 대하여는 진노하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집약되나 그 여파로
그가 속한 가족이나 집단, 심하면 민족까지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장이 부도를 내었으면
그 회사의 전 종업원이 고통당할 수밖에 없듯이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불순종하니까 가차 없이 하나님은
저들을 광야 길로 돌리시며 불순종과 불평을 하는 자들을 잘라 버리신다.
항상 하나님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진행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역시 일의 진행 방향을
인간들처럼 화가 난다고 아무렇게 쏘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경종서부터 경고를 하다가 점차 크게 간섭을 하신다.
뱀과 지팡이 사건, 애굽강의 피 사건 이어서 개구리 사건 등
결국에는 전 애굽의 첫 것은 동물이나 사람 할 것 없이 죽게 만들다가
마지막에는 바로와 그 애굽군대를 홍해바다에 수장시키고야 만다.
축복도 마찬가지다.
항상 작은 징조부터 보이다가 엄청난 축복이 뿌려지는 것이
엘리야의 갈멜산의 작은 구름사건이다.
말구유 탄생의 보잘 것 없는 사건이 전 인류를 복되게 하고
말도 잘하지를 못하고 눈도 좋지 않은 대머리에
키도 작고 배까지 나온 바울을 통해서 온 유럽선교의 기수로 삼으시고
무식한 뱃사람을 중심으로 시작한 갈릴리 사역이 전 세계를 흔들게 된다.
따라서 크고 작은 일이든지 영적인 자들을
항상 부딪혀 오는 문제에는 예민한 반응을 가진다.
나아만 장군이 보잘 것 없는 말 한마디라도 일곱 번 순종하니
문둥병이 씻은 듯이 낫듯이
흥할 자들은 하나님의 아무리 작은 간섭이라도 놓치지 않고 순종을 한다.
그러나 망할 자들은 아무리 경고가 깊어져도 모른다.
일이 막히고 꼬여도 모른다.
결국은 무딘 감정과 흐린 영성과 완악한 성품과 못난 고집이
자신을 죽이고 함께하는 식구들을 죽이는 것이다.
제발 하나님의 메시지를 심어주실 때 깨닫는 자가 되어라.
어차피 바로처럼 그 본성이 완악하여 그렇게 깨우쳐 줘도 모르는 자야
망해도 할 말이 없지만
이왕 신앙생활 할 것 하나님 말씀대로 방법대로 해서
실컷 일하여 놓고 헌신하고 버림받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말세에는 바로 같은 지도자를 만나느냐 ,
발람 같은 지도자를 만나느냐,
이세벨 같은 지도자를 만나느냐,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를 만나느냐가
내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에 언제나 기도해야 하고 신중해야 되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기도하고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세에는 나의 생명을 제대로 책임을 지는
참된 주의 목자를 만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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