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완전히 극과 극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속을 보시지만 사람들은 겉과 외모를 본다.
마치 바다 위의 수면만 주시하는 자는
물 밑 속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겉모습만 보고 사는 자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현실에 드러나 있는 수면 위만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바다 속의 모든 상황을 늘 보고 계시기에
물 밑의 흐름까지 다 보고 계신다.
그래서 물고기 떼를 불러와서 베드로의 그물에 걸리게 하고
요나가 물에 빠질 즈음에는
큰 물고기까지 불러서 예비해 놓으신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진리이시기에, 속이요, 중심이기에
모든 사물과 사람의 겉과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
거의 모두는 겉모양 중심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적 수준 외에는 관심이 전혀 없음을 잊지 말자.
하나님이 진리라면
내 속의 진리의 수준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마태 7:21~23을 보면 심판 날에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치를 못하고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한다.
한 평생 만들어진 작품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다.
제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人間을 찾으시는지 잊지 말자.
사람들은 그 하는 일이 불법이요, 부정이요, 사욕이요,
이기적인 발상인줄 알면서도
자기에게 가까운 자에게는 좋은 유익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라도
특별히 가까운 자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적 수준의 깊이에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그 속에서 거짓 없이
가까이 접근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두신다.
그래서 아무리 신분이 높은 대통령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거나,
그가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찾고 찾아도
그를 향한 영적 수준과 진리의 수준이 높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를 결코 기억치 않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사울 임금만큼 큰 자,
아름다운 자, 완전한 자,
도덕적으로도 품위가 있었던 자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사울보다 부족한 다윗에게만 관심이 있다.
왜 그럴까?
다윗의 그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기에
군대의 힘이나 병기를 의지하지 않고,
단 한 개의 물맷돌만 들고 나서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왜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초라한 마구간을 택하셨을까.
예수님의 관심은 화려한 곳, 높은 자리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는 진실하고 정직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자신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는
겸손한 자들이 있는 곳을 택하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분명히 人間的으로는
완벽한 바리새인, 유대인, 율법학자였지만
그 중심을 속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자기 안에서는 주님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마음이 있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불의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며
자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는데,
자기 안에서는 원하지 않는 다른 것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하면서
정말 자신은 주님 앞에서는
보여 드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한다.
겉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영적 수준과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칠삭둥이, 팔삭둥이처럼
어머니의 胎에서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자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결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끊임없이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하여 달려간다.
이것이 바울이라는 사람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들었다.
우리들은 때때로 왜 내게 복을 주시지 않고,
저렇게 못나고 약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주님은 중심을 살피시는 자요,
영적 수준을 보시는 분이시다.
세례란 무엇인가?
단순히 물을 찍어 머리에 바르는 것이 아니라
겉의 죽음, 세상의 인격, 배경, 육체가
모두 물속에서 장사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 받은 것도
그 속 중심의 영적 수준이 새로워져서 점점 높아지지 않으면
그는 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겉모습을 치장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것으로 착각을 하지말자.
교회에서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을 하지 말자.
겉모습은 영적인 깊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영적 깊이가 있는 속사람의 강건한 자는
겉모습은 자연스럽게 거룩의 향기가 풍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겉모습에 자연스런 神聖이 있는 자가 되자.
즉 나의 속사람과 겉 사람이 일치를 이루는 자가 되자.
이것이 그날에 주님이 나를 인정을 하는 축복을 받는 길이다.


겉모습과 영적모습
아브라함.
200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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