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발람의 경우를 보자.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길을 막으시는데도
끝까지 돈의 유혹을 받아 모압으로 끌려가고
끌려가면서도 두려워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그때 하나님은 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고 가르쳐 주시지만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길을 걸어간다.
참으로 웃기는 신앙이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잘못된 길인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자기의 욕심으로 다윗을 잡으려고 걸어간다.
그것이 두려워서 선지자의 무리 속에 들어가기도 했고,
사무엘을 찾아 가기도 한다.
그러나 끝까지 잘못 된 길에서 돌이키지를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잘못 된 것을 가르쳐 주고 지적해주면
알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길을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또 기도를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는 그 일을 계속해서 꾸역꾸역하면서 이상한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역을 하면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기도 한다.
우습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하고
그 길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끝까지 그 길을 못 버리고
그릇된 길로 달려가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주여 주여’하는 것일까?
사람의 마음에 최소한의 양심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비밀을 지켜 나갈 수가 없고,
아합처럼 이세벨을 끼고 있는 한
주의 능력과 기사와 이적을 체험해도 그는 돌이키지를 못한다.
원색 신앙의 답은 하나 밖에 없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해야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나의 열심이나 나의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주여 주여' 말하면서
기도에 정열적이고 열심 있는 신앙들 가운데서도
타협과 변질을 우습게 여기고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못하는 것이 거의 다반사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성전 중심의 삶이 식어지고,
내 영혼이 병들고 있고,
실제로 내 영적 생명은 죽어가고 있어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다.
거의 모든 신앙인들이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우습게 보거나
원색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습게 보고
자기와 같은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면 비웃고 다닌다.
잊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이나 뜨거움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제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서 열심을 내자.
늘 말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 있지 않는 열심들은
전부 잘못 된 것이며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으며
모든 사건마다 성령님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요,
그래서 모든 신앙을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해나가는 것이다.
바울의 아시아 전도여행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바울의 아시아 전도 여행을 계속 막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심에도 계속 고집을 피우니
그토록 귀한 전도도 되지를 않고
다른 일들까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제발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가자.
이제는 내 생각, 내 계획, 내 판단을 딱 세워놓고
‘하나님께서 나를 따라오세요.’ 라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이 먼저 드러나고
그것을 이루려는 열심에
하나님의 후원이 있는 그런 신앙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신앙이다.


이제는 영적 진단이 필요할 때.
아브라함.
200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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