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만나 경제를 통하여 균등의 법칙과
私心과 私有慾을 버리는 것만이
하늘나라 경제 공동체를 꾸릴 수 있고
여기에 승리한 자만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 후 만나 경제는 1500년이 지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경제관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광야라는 것,
이 세상이라는 것은 바로
이 세상과 같은 우리의 心田을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모든 것은 비유로 되어 있기에
오병이어의 사건도
실질적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나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때의 상황을
돈 많고 유능한 사람을 사용하시어
오병이어의 비유로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란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책이다.
살아있는 문서이기에 성경속의 모든 사건은
이 시대에도 반드시 일어나서 오늘 우리와 상관 되어진다.
그래서 갈 4:21-26에 나오는 하갈과 사라는
그 시대의 실존적인 인물이었으나 4000년이 지난 지금
사라는 시온 산, 즉 하늘의 예루살렘
자유자의 어머니로 비유되며
하갈은 시내 산, 즉 땅 위의 예루살렘
율법에 의한 종의 어머니로 비유 된다.
이것은 오병이어의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대의 실질적인 사건을
예수님은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빈들에서 광야의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자기 욕심에 끌려 죽은 세례요한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갖고
그 광야의 소리가 되기 위하여 다시 광야로 나간다.
광야는 언제나 말하지만 인간의 황량한 마음 밭이다.
옥토 밭이 되려면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처음에는 잘 하다가 사람들은 그만 이탈되어 버린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심전이 옥토 밭이 되지 못하면
바로 잡초가 자라 버린다.
주님이 광야에 나서자
가시와 엉겅퀴와 돌 짝밭 같은 심령들이 무리지어 찾아온다.
이제 예수님은 세례요한 대신
광야의 소리가 되어 황무지 같은 이스라엘의 심전을 개발하여
하늘나라 공동체가 어떻게 전개되는 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배고픈 민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줌으로
오천 명이나 넘는 무리가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난다.
자, 그러면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일까.
물고기는 비늘이 있는 해양 동물이 아니고
사람 물고기를 뜻한다.
바다는 죄악의 고해를 뜻하며
그 바다에서 그물에 걸린 사람들은
죄 악 된 이 세상에서 복음의 그물에 걸려
구원받은 자들의 비유이다.
그러면 보리떡 다섯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에서 보리나 밀은 여성을 뜻한다.
하늘나라는 보리떡 같은 여인이
누룩으로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하와는 천국을 부풀게 하는 누룩이었는데
그만 악독한 누룩이 되어 죽음의 자식을 낳은 모성이 된다.
따라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어머니가 나와서
인류를 다시 낳아야만 한다.
그래서 새 생명, 새 종교, 새 영의 누룩을 넣은 여인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보리떡 다섯 개란
주님의 복음의 쇠사슬에 걸린 다섯 여인을 뜻하고
물고기 두 마리 역시
주님의 복음의 쇠사슬에 걸린 부자 두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배고픈 민중들 오천 명을 앞에 두고
주님은 부자들의 믿음을 미리 보면서
저들이 지금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아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지 아시고
제자들을 시험을 하신 것이다.
결국 오병이어란 일곱 명의 부한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듣기위한 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200데나리온 이상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
부자들의 선교헌금이었을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온 어린아이는 정말 아무런 사심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배고픔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어린아이 같은 거듭난 존재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거듭나면 多心이 一心이 된다.
그러니까 주의 말씀 들음을 통하여
배고픈 민중을 보고 돈 많은 일곱 사람이
한 사람, 한 마음으로 통일이 되어
배고픈 형제들을 먹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한편으로는
왜 부자가 천국에 못 간다고 했을까.
私心과 私有慾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들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면
부자들 뿐 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든 재물들을 하늘에 쌓아둔다.
따라서 오병이어 사건은
주님께서 광야 같은 인간의 마음을 먼저 변화시킨 기적이요,
그 변화된 마음 밭에 하늘나라 경제관이 실천된 기적이다.
천국 갈 수 없는 부자들,
사심과 사유욕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들이 변화되어
하늘나라 청지기가 되고
황무지와 같은 어제의 부자들이
예수와 만남을 통하여 주안에서 모든 배고픔이 해결이 되어
우리의 모든 심령은 아름다운 옥토가 되는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마치 배고픈 민중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나를 40년을 아낌없이 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하나가 된 공동체가 되고나면
초대교회처럼 모두가 배불리 먹고 살게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모신 하늘나라 경제 공동체이다.
잊지 말자.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굶주리는 자들이 있으면
그것은 이미 하늘나라를 이루는 천국 공동체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교회마다 어떤 공동체를 꾸리고 있는가.
모두가 배부른 자들은 큰소리를 치고 살아가고 있고
가난한자들은 배고픔을 무릎 쓰고 주의 전에 앉아 있어도
이것은 분명히 주님이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인데도
본체만체하며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면서 셈을 하면서도
그들에게 특별히 주신 만나를 가지고
먹고 남는 하늘의 경제 공동체를 못 꾸리고 있다.
성령 받았다는 교회들이 이 일을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땅위의 교회들은
거듭난 자들을 하늘나라로 인도를 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공동체가 맞는가, 틀렸는가.
나는 거듭난 자인가, 아닌가.
분명히 오늘날의 교회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몇몇은
매일 부요롭게 먹고 마시고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사심을 가진 자들로 인하여
그토록 원하시는 주의 하늘나라 경제 공동체를 못 이루어
몇 사람들의 사유 욕으로 교회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망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하늘의 천상천국에 갈 자는
이 땅의 지상천국을 누리는 자들이다.
이것은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간에
반드시 지상 천국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
주님의 피의 값으로 세운 교회는
반드시 모두가 성령을 받아
성령 공동체가 되어 多心이 一心이 되어
모두가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고
자신의 사심과 사유욕은 철저히 버리는
하늘의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한다.
이제는 우리 모두 주의 물과 피로 거듭난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되어
모두가 오병이어의 존재 같은 자들이 되고
어린아이와 같이 모두 함께 살기를 바라는
순수함을 져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
이시대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전개되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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