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3:3-6)
caleb
200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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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온 우주 가운데 가장 큰 기적이다"(리, 각주, 영문판, p.1189).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하지만 역대로 그리스도인의 역사 가운데 거듭남에 대한 중요하고 핵심적인 의미가 점차적으로 무시되고 잊혀지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거듭남을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 다른 이들은 거듭남이 옛 생활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을 따라가기로 결정하는 시기라고 여기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Third Edition)조차도 거듭남을 "영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개정하다. 영적인 회심 혹은 부활을 체험하다. 개정하다"로 정의하고 있다. 거듭남이 "영적인 회심, 도덕적 부흥 또는 재출생"이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정의들은 너무 낮아서 이 소중한 진리에 대한 의미 전달에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사이트는 많은 명성 있는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글에서 발췌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거듭남의 의미와 합당한 체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다음 링크들은 주요 내용들을 통하여 거듭남의 의미를 찾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주요 내용들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 계시된 진리에 의해 뒷받침되는 간단한 정의

거듭남은 생명의 문제임-하나님과 그분의 거듭난 믿는이들과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내재적 의미

거듭남에 대한 사람의 필요-왜 자기 개선이 아닌, 거듭남이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가?

거듭나는 길-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의 첫 단계-왜 거듭남이 하나님의 충만한 구원을 체험하는데 중요 한가?

거듭남의 체험과 사례들- 성경, 전기, 개인 간증을 통해 기록된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듭남에 대한 체험

요한복음에 계시된 거듭남의 정의

거듭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팔링게네시아(palingenesia)"는 팔린(palin, "다시")과 게네시스(genesis, "탄생")란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Vine's).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난는 것입니다. 비록 이 단어가 매우 중요한 신약의 용어이지만, 스트롱 성구사전(Strong Concordance)에 따르면 이 단어는 신약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딛3:5, 마19:28). 위클리프(Wycliffe)는 그의 성경사전(Bible Dictionary)에서 "신약에서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이 동일한 진리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다시 태어남 또는 위로 부터 태어남(요 3:3, 벧전 1:23), 하나님께로서 태어남(요 1:13)" 같은 이러한 표현들은 새로운 출생 같은 역동적인 변화의 사상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거듭남의 정의는 교리적으로는 단순하지만, 그 의미와 실재에 있어서는 심오합니다. 윗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새 생명을 가져오는 재출생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생명의 문제이지 결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거듭남은 단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명 이외에 또다른 생명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 이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다른 생명을 갖기 위해 다른 출생을 필요로 한다. 거듭나는 것이나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고치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부모님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고(요1:13), 하나님으로 부터 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요3:15-16)을 갖는 것이다. (윗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98)

요한복음에서 계시된 거듭남 

그 단어의 성경상 용법에 의하면,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명백하게 해줍니다. 이 책에서 요한은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1:13), 다시 태어나는 것(3:3),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3:5-6)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구절들을 철저히 연구하면 거듭남에 관한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듯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임을 계시합니다. 이 구절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출생하다 또는 태어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같은 생명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듯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들은 거듭남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 이외에 다른 수단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 전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거듭남의 기적을 이해하고 체험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진실로 온 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윗트니스 리, 각주, 1189)

다시 태어남

요한복음은 거듭나는 것이 또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계시합니다(3:3). 이 구절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원문 참조)?(3:3).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영적인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존 넬슨 다비는 그의 성경 번역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 이상의 뜻을 지닌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다시?란 단어는 ?다시'라는 뜻 뿐만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근원과 출발지점에서도 역시 ?완전히 새롭게'라는 뜻을 지닌다고 설명했습니다. 거듭남은 생명의 새로운 근원이며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1268)

거듭남은 참으로 "새로운 시작"입니다. 단지 행위나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이 생명의 "새 근원", 새 출생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는 오직 물질적인 것들만 볼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깨닫기 원한다면, 너는 반드시 다른 생명을 받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2장의 사도 바울의 말과 부합합니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1-12절) 이 성경 구절은 거듭남이 참으로 단지 시간이나 행위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생명의 새로운 시작임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이 이러한 말들을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했기 때문에(각주 3:52 참조),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두 출생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주님은 구별된 두 사역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물로 태어나는 것은 침례 요한의 사역인 "종결"의 사역을 가리킨다.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죄악된 상태를 회개하고 영적 죽음과 장사를 의미하는 침례를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가져오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하였다(마 3:11).

또 다른 방면인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요한의 사역에 근거하여 그 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명의 사역 또는 "발아"의 사역을 언급한다(요 3:6, 요 12:24). 6절에서 주님은 거듭나는 것이 사람의 영(하나님을 담도록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가장 깊고 내재적인 부분) 안에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계시하셨다. 거듭날 때 성령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한 영이 되고,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전 6:17; 롬 8:16).

소책자 "거듭남이란 무엇인가?"에서 윗트니스 리는 이 부분의 성경 말씀을 분명히 했습니다.

거듭남은 옛 창조의 사람를 그의 모든 행위과 함께 종결하고, 신성한 생명으로 새 창조 안에서 그들을 발아시킨다. 사람이 회개하며 자신은 죽고 장사되는 것 외에는 소용없는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는 요한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회개한 후에 그는 반드시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생명의 사역을 받아들여 발아되어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는 회개와 믿음 모두가 필요하다. 이것이 물과 성령 으로 나는 것의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2-3).

거듭남은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입니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는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생명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거듭남에 대한 이 진리는 불분명하고 충분히 강조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거듭남과 거듭남이 가져오는 유기적인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거듭난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특별한 종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과 똑같은 조에(Zoe)의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Vine's Dictionary). 신약 성경에서(한국어로는 생명과 생활 두 가지로 번역되지만) 서로 구별되는 세 개의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비오스(bios)로 수명(눅 8:14)과 생활의 관습과 방식(딤전 2:2), 생활의 수단(막12:44, 눅8:43)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두 번째는 슈케(psuche)로 마음, 생각, 혼(천연적인 생명), 인격을 가리킵니다(마2:20, 눅12:22; 9:4). 세 번째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조에(zoe)입니다. 조에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과 똑같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입니다. 아버지는 이 생명을 그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셨으며 이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복음 5장 26절)(367-368).

다음 개요는 "조에"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조에"의 근원이다.(요 5:26)
아들은 "조에"의 체현으로 사람이 "조에"를 갖기를 갈망하신다(1:4, 5:26, 10:10)
그 영은 "조에"이고 "조에"를 준다(롬 8:2, 요 6:63, 고전 15:45)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조에를 영접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된다(요 3:15-16, 36, 요일 5:11-12, 롬 8:10, 갈 2:20, 골 3:4, 벧후 1:4).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면 거듭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생명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1-2). 폴 빌하이머(Paul Billheimer)는 그의 책 "보좌를 향하여(Destined for the Throne)"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 자신의 가정을 얻는 것이었다. 이 가정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출생하여 그분 자신의 "씨", "유전자"에 병합된다. "오래전, 심지어 세상을 만드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해 하실 것을 통해 우리를 (유전학적인 의미에서) 그분 자신이 되게 하실 목적으로 우리를 택하셨다"(엡1:4, 5:25-27, 32LB). 이 개인적이고 유기적인 가족 관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한히 광대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계획과 새 출생을 통한 구속을 마음에 품으셔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히2:10)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유일하고 기이한 산출 방식을 세우기 위해 구속의 계획이 도입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기이한 방법에 의해 "많은 아들들"을 낳으시고 거룩게 하는 과정으로써 그들을 점진적으로 징계하여, 그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36-37)

전통적으로 거듭남에 대한 종교적인 관념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는이들을 입양하여 그들에게 아들의 위치를 주지만 그들과 생명의 관계는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러한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념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어디에서도 양자 관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거듭남을 아이의 출생에 비유했습니다. 마빈 빈센트(Marvin R. Vincent)는 그의 헬라어 단어 연구에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사용된 자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Tekuou(자녀)는 본성이 동일한 관계를 나타내는데 반해 uioV(아들)은 오직 입양과 상속권을 나타낸다.요한은 결코 아들을 사용해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입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 생명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Word Studies, 49) (Recovery Version 1 John 2:297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날 때 그들이 받은 생명이 피조되지 않은 생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요동하는 감정은 멈춰질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확고해 질 것입니다.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음

하나님의 가족의 유기적인 구성원인 믿는 이의 거듭남 또한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같이 영원하고 항구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하며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전1:23), 우리는 영원하고도 깨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립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아이가 아무리 개구장이이고 말을 듣지 않아도 여전히 그는 그 부모의 아이입니다. 부모나 아이가 어떤 결정을 한다 해도 그들의 상호적인 관계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관계는 행동이나 의지에 기초한 어떤 것보다도 앞서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에서도 이것이 진리일진데,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 사이의 출생 관계는 훨씬 더 확고되지 않겠습니까?

이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듭남을 단지 영적인 전환이나 도덕의 회복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누림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까지도 요동하고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기초를 두고 보장됩니다. 메리 멕도너(Mary E McDonough)는 이 계시의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출생 관계의 의미를 보지 않는 한,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진보는 느리고 불확실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잘못을 행했을 때 그들은 은혜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거듭났을 때 받은 생명이 창조되지 않은 생명, 곧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의 믿는 이들의 위치가 그들의 요동하는 감정에 따라 바뀌지 않을 것이다. 죄인이 그의 죄악되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시인하고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명히 돌이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면)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그의 영 안에 그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요 1:12, 롬 8:16-17 참조) 이것이 거듭남의 의미이다. (메리 멕도너, 하나님의 계획, 67)

왜 사람은 거듭나야 합니까?
비록 거듭남의 의미가 우리에게 분명할지라도, 우리는 거듭남의 필요에 대해 또 한번 인상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은 아담의 불순종때문에 손상되고 사탄적인 본성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Regeneration, 6-7). 도덕, 자아 개선, 가르침은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렘17:9)을 개선시킬 수 없습니다. 거듭남만이 사람의 필요의 각 방면들을 충족시킵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사탄적인 본성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사탄적인 본성으로 조성됨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단지 죄악된 외적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죄악된 내적 조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사탄적인 본성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죄를 집니다. 사람은 외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라 내적인 요소 때문에 본성상 부패하고 타락되었습니다(윗트니스 리, 각주, 623-624).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된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 하셨다(17절).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은 사탄인 뱀에 속아 그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6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죄의 본성으로 중독되었다. 이것을 타락이라 한다. 이것 때문에 모든 인류가 부패하고, 손상되고, 사탄의 죄악된 본성으로 조성되었다. 로마서 5장 12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설명한다(5:17-19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의 상태를 향상시키려는 의도가 없으십니다. 대신에 그분은 우리의 본성, 우리의 조성을 변화시키시길 갈망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의 상태를 향상시키려는 의도가 없으십니다. 대신에 그분은 우리의 본성, 우리의 조성을 변화시키시길 갈망하십니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더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고(벧후1:4) 그분의 생명으로 재조성시키십니다(골3:4; 갈2:20). 사람의 유일한 희망은 타락한 옛 본성을 죽음에 넘기고 장사지낸 후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롬 6:3-9)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 생명을 가지고 있든지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이 없는 한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의 생명임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가 단지 사탄의 본성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를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Regneration, 7). 윗트니스 리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 생명을 가지고 있든지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이 없는 한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10). 이같은 더 높고 더 깊은 인식에 따라 우리는 창세기 3장의 사람의 타락의 문제를 뛰어넘어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다(26절). 장갑이 손을 담기 위하여 손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듯이 사람도 하나님을 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생명은 하나님을 나타냄).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먹음으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의도하셨다(2:17; 3:22-24).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은 사람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가 없더라도 연전히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갈망에 미치지 못합니다. 윗트니스 리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어 이 생명으로 의해 변화되어 그분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인간 생명이 창세기 3장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거듭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아담은 죄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생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 의 생명을 영접하여 거듭나도록 그들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죄 없는 사람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사람,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을 얻는 것이다. (7-8)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경건한" 행동은 단지 지속될 수 없는 외적 연기입니다.

도덕, 자아 개선, 가르침은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없음

처음 시작부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질적인 필요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다만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 자아 개선, 윤리 혹은 종교적인 가르침도 결코 이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처럼 행동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거듭남만이 사람의 내적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는 낼 수는 있습니다. 원숭이는 사람같이 옷 입고 사람같이 행동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생명은 여전히 원숭이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쩔수 없이 원숭이의 생활로 되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경건한 행동은 단지 지속될 수 없는 외적 연기입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필요는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으로 나는 것,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길은 우리의 상태와 필요를 인식하는데서 시작됩니다.(윗트니스 리, 생명에 관한 기본 공과, 65) 이러한 인식을 가진 후에 우리가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의 아들 안으로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완전히 얻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편에서 해야 할 일은 다만 믿는 것 뿐입니다.

거듭나는 길은 우리의 인식으로 시작한다

거듭나는 길은 우리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됩니다.("사람의 필요인 거듭남" 참조) 우리에게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거듭남을 실제로 체험하는 데로 이끌려 집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상태를 깨달을 때 즉각적으로 회개(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이킴)의 필요성을 느끼고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필요가 거듭나는 것임을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역사를 말씀 안에 두셨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 안으로 믿음(아들에 관한 말씀의 증거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영접함

일단 사람이 그의 상태와 그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생명임을 깨달으면,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취해야 할 다음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아들에 관한 말씀의 증거을 믿음으로 아들 안으로 믿습니다(66-6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는 아들의 인격과 역사에 대하여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에 관한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아들 안으로 믿고 거듭납니다. 1900년대 초에 존경받던 그리스도인 교사인 웟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많은 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역사를 담는 주머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역사를 그분의 말씀 안에 두셨다. 만약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그분의 아들의 역사와 그 역사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신다면 어떻게 그것을 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십자가의 역사를 그분의 말씀 안에 두셨다. 또한 그분의 아들의 부활의 증거도 말씀 안에 두셨다. 오늘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받을 때 그분의 역사의 증거를 받는다. 말씀 뒤에는 분명히 사실이 있다. 만약 말씀 뒤에 사실이 없다면, 말씀은 공허할 것이다. 말씀 뒤에는 확실히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역사를 말씀 안에 두셨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그분을 믿는 것이다. (The Gospel, 276-277)

우리에게 믿음이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거듭남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믿는 것입니다. 선행과 도덕적인 행동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고 거듭나는데 필요한 단 한 가지 조건은 다만 믿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성경은 아주 명확합니다. 100개가 넘는 구절들이 믿음으로(거듭남을 포함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생명을 받는다고 말합니다(The Gospel, 267).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 10장 9절, 10절, 1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는 주라고 크게 고백한다면, 거듭남의 체험은 우리에게 실제가 될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믿음,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에 대한 증거에 대한 믿음이 마음의 기능임을 계시합니다. 그 후 우리는 마음에 믿은 것을 입으로 고백합니다. 입은 거듭남의 체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는 주라고 크게 고백한다면, 거듭남의 체험은 우리에게 실제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마음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표현하는 길은 단순히 우리의 입으로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은 다만 "예수는 주시다"라고 말하거나 그분의 이름인 "주 예수"를 부르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포괄적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온전하고 완전합니다. 그분의 구원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여 우리가 영화롭게 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 구원의 체험의 시작과 중심입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리적으로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는 있어도 그분의 생명 안에서 유기적으로 구원할 길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면 모두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두 방면, 곧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의 법리적인 방면은 우리의 객관적인 위치, 곧 율법과 관련된 우리의 의를 다룹니다(롬 3:23-25). 법리적인 면에 기초를 둔 유기적인 방면은 우리를 내적, 주관적으로 구원하며 신성한 생명 안에서 우리의 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5:10). 이 두 방면이 없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에 포함된 항목들은 다음 개요와 같습니다.

법리적인 방면

구속 (엡1:7)
죄사함과 죄로부터 깨끗게 됨(마 26:28, 요일 1:9)
의롭다 하심(롬 3:23-26)
화목(롬 5:10-11)
유기적인 방면

거듭남(요 1:12-13)
성화 (살전 5:23)
변화(롬12:2, 고전3:16-18)
형상을 본받음(롬8:29)
영화롭게 됨(롬 8:30, 골3:4) (윗트니스 리, 구원)
많은이들이 구원을 단지 법리적이라고 여기는데 이러한 관점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사람을 그의 죄들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고,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내적 존재를 다시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으로 이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거듭난 영은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확산되기 위한 거점이 됩니다.

거듭남은 구원의 체험의 중심임

우리는 반드시 거듭남이 구원의 체험의 중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중심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generation, 1).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우리의 온 존재(영, 혼, 몸)를 구원하기 시작하십니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요 1:12-13, 3:3-6). 우리의 영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은 점차적으로 모양을 갖추고 자라며 우리의 혼으로 확산됩니다. 거듭난 영은 성화, 변화, 형상을 본받음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화롭게 될 때까지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확산되기 위한 거점이 됩니다. 이 완전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궁극적인 갈망을 이루시는데 그것은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이 생명이신 그분 자신으로 완전히 충만해져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엡 3:19, 계21:9-11).

성경 -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성경에 있는 거듭남에 대한 가장 좋은 사례는 니고데모입니다. 아래 내용은 윗트니스리의 거듭남이란 무엇인가?에서 발췌했습니다.

거듭남의 사례-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은 새로운 출생에 대해 말한다. 새 출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니고데모의 놀라운 사례 또한 이 안에 있다. 그는 뛰어난 미덕과 높은 학식을 가진 교사였다. 그는 유대인의 교사로서 신성한 말씀인 구약을 가르쳤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어서 존경받고 권위가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이가 든 사람으로서 경험이 충만했고, 도덕적으로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추구하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밤에 주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니고데모는 아마 60 내지 70세의 나이든 사람이었지만 삼십이 조금 넘은 주 예수님을 보러 왔다. 이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준다. 그는 교사였지만 주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람을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니고데모보다 더 선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확실히 그는 훌륭한 지식과 높은 수준의 도덕을 지닌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

니고데모가 주 예수님께 왔을 때, 주님은 기회를 잡아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를 계시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서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선하던 간에 여전히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남은 사람의 첫 번째 필요이다. 부도덕한 사람들 뿐 아니라 도덕적인 사람들도 거듭나야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가 그들이 죄악되고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죄로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거듭남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창 2:9).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생명을 대표한다. 만약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거듭났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거듭남의 예로 사용하신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만약 그분께서 요한복음 4장의 죄 있는 여자를 예로 들으셨으면, 아마 우리는 오직 죄 있는 사람만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또다른 종류의 출생

니고데모는 그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3:6). 그분은 니고데모에게 그가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나온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시간 안에서 또 다른 출생이 아닌, 본성에서 또 다른 출생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사례

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거듭남의 예로 사용하신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만약 그분께서 요한복음 4장의 죄 있는 여자를 예로 들으셨으면, 아마 우리는 오직 죄 있는 사람만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니고데모는 도덕적인 문제나 죄의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다. 주님은 선한 사람 니고데모를 거듭남의 예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선하던 악하던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우리 모두가 거듭날 필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8-12)

다음 간증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전기와 개인 간증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요한 머레이(John Murray)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둘 다 헌신적인 선교사 목사의 아들로서 건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들 모두는 정통적인 성경신학을 공부했으며, 정통적인 성경신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들은 또한 건실한 그리스도인의 활동들과 단체에 그들 자신을 드렸다. 네델란드에서 그들은 사역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매우 탁월했다. 확실히 그들은 외견상으로 본받을만한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갖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교육과 학식과 신념은 그들로 또 하나의 중요한 확신을 갖게 하였다. 그들은 "마음이 기묘하게 포근해지는 느낌"이 그들이 간절히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역사라는 참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지만 사람이 또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외적인 활동이 아무리 선하고 경건하더라도 그것들이 새로운 출생의 깊고 내재적인 역사와 혼돈될 수 없다. 참으로 앤드류의 아버지는 앤드류가 유트레이트(Utrecht, 네델란드 남서부의 도시)로 가서 사역을 준비하겠다는 소식에 답할 때 이것을 염두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네가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축하하고 주님께서 그분의 원함대로 너의 마음을 이끄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기쁘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가 너의 마음을 지금 뿐 아니라 영원히 그분의 소유로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끝까지 그분을 따라가리라 확신한다.

또한 천사들도 기뻐할, 당신의 아들이 거듭났다는 더 기쁜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할 때 부모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거라 확신한다...

앤드류는 부모님과 요한 삼촌과, 그와 요한이 스코틀랜드에서 만난 전도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될 때 임하는 은혜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보게 되었다.

1845년 11월 14일에 그의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서 앤드류는 처음으로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저는 오늘 또다른 동생이 태어난 소식을 담은 8월 15일의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습니다. 또한 천사들도 기뻐할 당신의 아들이 거듭났다는 더 기쁜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할 때 부모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거라 확신합니다. 어떻게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되돌아볼 때 난 다만 아무것도 못 보았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지난 이 삼년 동안 긴 과정이 있었습니다….예전에 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인인 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내어드렸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Lindner, Murray 24-26)

허드슨 테일러

이 모든 일들은 허드슨 테일러가 아버지의 책들에서 흥미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조용한 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집을 비웠었고, 소년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집은 텅비어 보여서, 소년은 이야기 책 하나를 들고 지루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한 계속 읽으리라고 생각하며 그가 좋아하는 낡은 창고의 한 구석으로 갔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어머니는 토요일 오후 그의 외아들에 대해 특별히 부담이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떠나 혼자 가서 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했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어머니는 토요일 오후 그의 외아들에 대해 특별히 부담이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떠나 혼자 가서 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기쁜 확신이 마음에 가득 넘칠 때까지로 몇 시간이고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편 어린 테일러는 그가 집은 소책자를 읽고 있었고, 이야기가 더욱 진지하게 전개되어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일"이라는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누가 성령의 역사의 비밀을 설명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친숙했지만 경시해왔던 진리가 그의 생각과 마음에 다시 떠오른 것이다.

"왜 작가가 그런 단어들을 사용했을까? 왜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또는 화해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그는 물었다.

갑자기, "다 이루었다"는 글자에 빛이 났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었나?

그의 마음은 "죄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화해"라고 대답했다. "위대한 대속자가 이 빚을 갚았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 뿐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런후 놀랍게도 분명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면, 모든 빚이 갚아졌으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한가지 그리고 유일한 대답이 그의 혼을 사로잡았다. "무릎 꿇고 이 구주와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그분은 찬양하는 것 외에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예전의 의심과 두려움들은 사라졌다. 우리가 회심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체험의 실제가 그를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새 생명이 그에게 왔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새 생명이 가져온 변화는 위대했다.

새로 발견한 기쁨을 어머니와 함께 나누기를 기다렸기에,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시자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겼다.

"안다, 내 아들아, 알아", 어머니가 그 아들을 안고 말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기쁜 소식으로 나는 2주 내내 기뻐하고 있었단다." (Howard, Spiritual Secret 16-188)

무디 (D. L. Moody)

지난 11개월 동안 드와이트(무디의 이름)는 에드워드 노리스 컬크(Dr. Edward Norris Kirk)박사의 설교를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 교회는 12년 전, 여타 큰 도시에 있는 교회의 엄격한 교리와 배타적인 면에 불만을 품은 보스톤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컬크 목사는 사람의 죄악 됨과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의 무능력함을 강조하였다. 그 목사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믿는 사람들 각각의 친구가 되기를 갈망하심에 대해 말하였다. 한편 컬크 목사는 그러한 위대한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였고, 심한 말로 그들을 비난했다.

지난 11개월 동안, 드와이트는 컬크 목사의 메시지와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의 가르침에 생각이 잠겨들면서, 자신이 영적인 싸움 중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죽기 직전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생각했었다. 나는 폐병이나 중병에 걸려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전까지 세상의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려 했다.”

컬크 목사는 영적인 것은 선택하고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선택이 믿음의 생활로 이끌려진다고 강조했다. 어린 드와이트는 목사의 말이 옳다고 느꼈지만 아직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 후 4월, 마운트 버논 교회(Mount Vernon Church)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그리고 1855년 4월 21일 토요일, 에드워드 킴볼은 다루기 어려운 한 주일학교 학생에게 그의 영혼에 대하여 말하겠다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그는 드와이트가 뒤 쪽에서 신발을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드와이트를 당황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되돌아 갔다가 편한 시간에 다시 오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그 목사는 후에 이렇게 진술했다. “일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가야할지 망설였다. 그리고 내가 이 소년에게 전도하면 그는 당황할 것이고 내가 돌아갈 때 다른 점원들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볼 것이고, 그들이 내가 와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되면 무디를 놀리면서 내가 그를 착한 소년으로 만들려 했느냐고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지금 시도하여 한번에 끝내자고 마음 먹었다.”

"태양은 예전보다 훨씬 더 밝게 비췄고 마치 나에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보스톤 커몬(Boston Common)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나는 나무 위에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모든 새들이 나에게 노래를 불러준다고 생각했다."

신발가게 뒤에 있는 드와이트에게 가면서 그는 그의 손을 드와이트 어깨에 놓고 기대며 발을 신발 상자 위에 놓았다.

킴볼은 드와이트의 눈을 보며 "너를 사랑하시고 너의 사랑을 원하시며 반드시 너의 사랑을 얻으셔야 하는 그리스도께 너는 와야 한다."라고 말했다.

드와이트는 생각에서 발버둥쳤고, 결국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켰다. 그는 킴볼의 권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킴볼은 나중에 "나의 간청은 설득력이 적었지만 나는 진실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그 청년은 자신에게 임한 그 빛을 받도록 예비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보스톤의 신발 가게 뒤편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음날 아침 방을 나올 때에 드와이트는 무한한 행복과 평강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활짝 핀 웃음과 큰 갈색 눈에 반짝이는 신선한 생기는 새로 찾은 그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태양은 예전보다 훨씬 더 밝게 비췄고 마치 나에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보스톤 커몬(Boston Common)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나는 나무 위에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모든 새들이 나에게 노래를 불러준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걷는 동안 모든 창조물이 그를 격려 하는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나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 증오하는 느낌이 없었고 모든 사람을 내 맘에 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회상하며 말하였다. (하비, 무디, 영문판 p.28-30)

웟치만 니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셨다.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은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 사람들은 어머님도 고모님과 같이 딸 여섯을 낳은 후에야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어머님은 아직 분명히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어머니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십 칠 세 때 구원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과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죄에서 구출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나의 전 일생과 연관되어 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면, 나는 그분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나를 죄로부터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려 했다. 그 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놓고 구원만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믿지 않자니 마음이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끓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여진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러한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면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구주를 보았다. 한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주님의 보혈이 나를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한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 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내 일생 중에 첫 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윗트니스 리,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웟치만 니, 12-13)





교회사

다음 간증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전기와 개인 간증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다음 글은 윗트니스 리가
직접 자신의 구원에관한
체험을 쓴 것입니다.

내 모친의 외조부는 남침례회의 신자였고, 그분은 나의 모친을 기독교로 인도했었다. 나의 모친은 미국 남침례회 학교를 다녔고, 1885년 쯤 십대였을 때 침례를 받고 남침례회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1905년에 출생했다. 그녀는 나를 그녀가 나가던 치푸에 있는 한 침례교 교회로 데리고 갔다. 나는 치푸에 있는 남침례회 중국 초등학교를 다녔고 미국 장로회가 경영하는 영어 선교 대학에서 공부했다. 비록 내가 어렸을 때 남침례 교회의 예배와 주일 학교에 참석했었지만 그 때 나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고 또한 침례를 받지도 않았다. 결국 오 년 후 나는 어떤 기독교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둘째 누님은 구원받은 후 나를 위해 기도했고, 나에게 중화 자립회의 아주 좋은 중국 목사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이 목사님은 여러 차례 나를 심방했고 나에게 주일 예배에 참석하라고 권했다.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1925년 음력 초 이튿날 아침 일찍 그 중화 자립회의 예배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약 이 개월 반 후 나는 약세를 받음으로 그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 되어 같은 해 사월에 나는 왕포진 자매의 복음 전파로 참되게 구원받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아직 나의 교육과 장래에 대해 포부가 큰 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왕포진 자매의 복음 전파로 구원받은 그날 오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왕 자매의 메시지를 따라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었다. "하나님, 나는 애굽인 세상을 통해 바로인 사탄에게 강탈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섬기기 원하고 어떤 대가가 들더라도 내 일생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윗트니스 리,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283-284)

다른 곳에서 그는 이 체험에 대해 더 상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나에게 하늘에 속한 사닥다리가 나타났고 나는 그 위를 올랐다. 나는 마작 테이블을 버려두고 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스무 살 이전에 나는 어머니 몰래 마작을 했다. [중국인들은 모두 마작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어느날 나에게 하늘에 속한 사닥다리가 나타났고 나는 그 위로 올랐다. 나는 마작 테이블을 버려두고 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 목사를 결코 잊지 못한다. 내가 마작을 하는 동안 그는 매주 나를 방문했다. 나의 누이는 중국에서 가장 좋은 여자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 주님을 사랑했고 내가 주님으로부터 얻어진 바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 목사에게 나를 맡긴 것이다. 그러한 부탁을 받은 후 그는 약 3, 4개월 동안 매주 나를 찾아왔지만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12월 말에 그는 "당신은 연말에 사업 때문에 할 일이 많아 바쁘지요. 그래서 다음 주에는 당신을 방문하지 않겠습니다. 설날이 지난 후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하늘에 속한 사닥다리는 왔다. 모든 중국인들이 아는 대로 중국의 새해에 두 번째 날은 타락과 노름과 모든 형태의 오락의 날이다. 그날 나는 일어나 가장 좋은 새 옷을 입었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새옷을 입고 서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오늘 뭘 할 계획이니?"라고 물으셨다. 그녀의 질문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 없이 바로 "전 유 목사님의 교회에 가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나의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교파 교회에 갔었다. 그 때가 내가 하늘에 속한 사닥다리를 처음으로 오른 때였다."(윗트니스 리, 사랑의 말씀,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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