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떠나니 바다가 보였다
이난수
2003.11.16
조회 139
바다를 떠나니 바다가 보였다

글: 이난수

봄비가 촉촉이 내립니다.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나는 비 내리는 창가에 서 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다니던 숲길과 정원의 나무는 고독한 모습으로 세찬 눈보라를 맞고 있더니 오늘, 창으로 내다보는 나무는 어느새 연녹색의 봄기운이 서려 있던 친구의 편지처럼 여기저기서 봄의 서곡이 들립니다.
1973년 2월 하순 우리 부부는 공학도로서 현장 근무지와(남편은 독일서 귀국 후에 바로 갔으므로 나보다 1년 먼저 감)여학교 교사로서 첫 부임 학교를 따라 부산에 갔습니다.
서울역 발차 관광호에 몸을 싣고 눈 내리는 추풍령을 지나 처음으로 맡던 비릿한 바다냄새, 낯선 부산역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혈연이나 친구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지도의 남녘 항도 부산에서 소꿉살이같은 신혼살림을 시작하던 첫 해, 나는 여러모로 많이도 당황했었습니다.
학생의 신분에서 교사로, 미혼에서 신혼으로, 고향에서 타향으로 갑자기 바뀐 내 생활의 변화도 변화였지만 안정감 없이 늘 바람만 부는 을씨년스런 날씨에 싸우는 듯한 인상을 주는 억센 억양과 앞과 뒤의 말을 연결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산 특유(?)의 말씨 등에서 오는 소외감, 집과 학교로 통하는 거리를 제외하고는 늘 서툰 지리, 어느 것 하나 정답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 나에게 집과 학교는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해가 설핏하면 퇴근길에 산업도로에서 만나는 서울행 그레이하운드에 나는 무작정 오르고 싶은 강한 충동을 여러 번 누르며 곧 다시 돌아가리라는 생각으로 마음 한 자락의 이삿짐은 풀지 못한 채 늘 춥게 살았습니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내가 처음으로 몸담은 학교는 부산대학과 마주 바라다 보이는 부곡동에 위치한 낮은 언덕 위의 아담한 건물로 공원 같은 학교였습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본관 건물 중앙에 <국어사랑 나라사랑>의 현판이 붙어 있고 맨 먼저 시원스럽게 물을 뿜어 주던 분수대와 만나며 여러 꽃나무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넓은 운동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학교 건물을 안고 있는 구월산에서 교실 창가에까지 들려주는 산새 소리와 봄이면 진달래꽃이 가을이면 억새 숲이 좋았습니다.
나는 동료들과 더불어, 때로는 혼자서 이 교정을 걸으며 목련 천리향 라일락 그늘 아래서 잠시 머리를 식히곤 했습니다.
월요일 애국 조례 때 운동장 층계에 서면 웅장한 부산대학 건물과 병풍처럼 아름답던 금정산 자락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더구나 학교로 오르는 언덕길 양편에 늘어선 플라타너스의 녹음과 단풍은 바쁜 출근 시간에 쫓기며 걷기엔 너무나 아까울 만큼 고왔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자연 환경 탓인지 나는 차차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며 학교생활에도 적응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교정에서 자주 시상에 잠기곤 했는데 첫 시집 <오늘의 얼굴>에 실린 대부분의 시가 이 시절에 쓴 것입니다.
금정여중은 문교부 지정 연구 학교였으므로 많은 선생님들이 수업 외에도 여러 잡무로 퍽 분주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국어과 교사로서 문예반, 방송반, 웅변반등을 맡아 특별활동 지도를 했습니다. 특히 연구 학교였으므로 학교 현황보고룰 위한 슬라이드 녹음방송을 자주 했었고 학교신문 <분수대>를 창간해서 맡아 지도했으며 고전읽기, 고운 말 쓰기, 또 그 당시 부산시 교육위원회 주최로 매달 실시되었던 창작시조짓기 담당 지도교사로 열을 올려 학생과 선생님들의 개인상은 물론 학교 단체우수상도 받았습니다. 나는 이 때에 창작시조짓기 우수교사로 구성된 <볍씨>의 초기 동인으로 발간되는 <부산교육>에 시를 발표하고 또 편집위원으로도 일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교무실 내 책상에 늦게까지 남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원고를 쓰고 읽고 심사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학교생활은 여러모로 분주했지만 나는 샘솟는 의욕으로 정열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학교에서 만난 동료는 형제처럼 따뜻했고 윗분들은 어버이처럼 훈훈하여 나는 지금도 마음속에 소중하게 모시고 있습니다. 또 내가 맡던 최초의 담임 학급인 2학년 5반 제자들의 이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석 번호 순서대로 줄줄 욀 정도로 애착이 갔으니 금정여중은 첫사랑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산에 10여년 머물면서 나는 주로 온천동에서만 살았습니다. 깔멜 수녀원 입구, 재활원앞, 온천 삼익아파트 등에서…….아마도 학교와의 거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온천동을 즐겨 걸었습니다.
추억의 온천동!
지금도 내 기억의 지도에는 온천동의 거리거리가 손바닥의 손금처럼 자세하고 선명하게 보입니다.
주말이면 찾아가던 파출소 앞의 꽃집, 자주 들렀던 온천서림, 분위기 있던 찻집, 늘봄공원의 귀여운 구관조, 물이 좋던 온천장, 시골집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던 오시게 장날,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유치원, 온천시장, 가을이면 국화 전시회가 멋지게 열렸던 원예학교 , 우장춘박사 동상 근처의 놀이터, 비갠날 능선이 돋보이던 만덕고개, 주일 아침이면 온 가족이 손잡고 나갔던 금정산 언덕에 있는 온천제일교회…….그러나 나에게 가장 강렬한 추억을 심어 준 곳은 병풍처럼 아늑하게 둘러서서 사계절의 모습을 변화 있게 보여주며 때때로 고향의 산 냄새와 뻐꾸기 울음소리까지도 전해 주던 금정산으로 그 매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자주 금강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아침 일찍 금강공원 금어사 약수터에서 땀을 식히며 약수를 마시고 폐부 깊숙이 아침 공기를 갈아 넣으며 맨손체조를 했습니다. 솔바람이 부는 벤치에 앉아 비둘기 떼와 이름 모를 산새 소리를 들으며 잠시 시상에 잠기는 기쁨!
아침 산책길, 산에서 만나는 얼굴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반갑고 신선했습니다. 풋풋한 산 냄새를 온몸에 받으며 클로버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금강공원 후문을 향하는 숲길로 돌아서며 우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온천서림
이 난수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 입구에
이층으로 된 서점이 있었다.

숲길을 걷거나
꽃집에 가거나
퇴근길에도
어김없이 찾던 그 곳

온천동이
고음과
현란한 불빛으로 몸살해도
늘 고요하고
무게 있던 집

안개비 내리던
봄날,
여기서는
푸른 휘파람의 시인도 만나고
화가도 만나고
피도는 조국과
거울 속의 나도 만났다.

젊은 날의 십여 년을
하루처럼 드나들어
이제는
문소리도 확실해진
그 집의 일부가
오늘은
목록표대로
내 방에 꽂혔다.
추억에 꽂혔다.

나는 오랫동안 정열을 바쳐서 근무했던 금정여중에서 가까운 이웃 학교로 옮겼습니다.
내가 떠나던 날,
플라타너스 언덕길 양편에서 감색 제복을 입고 뜨겁게 전송했던 제자들, 여러 선생님의 모습, 특히 친정아버님처럼 새 부임 학교에 나와 함께 동행해 주셨던 학교장님의 인자하심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무한에 비약하는 순간을 가져라!” 이 귀절은 그 무렵 내 공부방에 걸렸던 좌우명이었습니다.
나는 무언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었고 문학과 학문에 깊은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서울을 떠나올 때 인사를 드리러 원효로 자택으로 찾아 뵈온 박목월 스승님의 말씀이 뒤늦게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결혼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뒤로 미루던 내게 “대학원은 꼭 진학해야 된다. 그리고 부산은 바다가 있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 세계가 열릴 것이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어느 날, 동창회 모임에 상경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학교에서, 문단에서 눈부신 자기 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학은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이라고 스스로 믿으며 문단 추천에도 게을리 하고 있던 중에 이끌어 주시던 스승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내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는 문학과 학문에의 스승을 못 만났기에 나는 더욱 주변의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심을 굳히고 교육계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동의를 얻어 사표를 썼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시간에의 넉넉함과 자유는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밤늦도록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고, 음악 감상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고 , 햇빛 쏟아지는 거리를 유모차를 밀고 산책하기에 좋았습니다. 방학 때가 아니고서는 하기 힘들었던 부산 - 서울의 기차 여행이 좋았고 이모저모 집 단장도하고 식탁 준비도 성의 있게 신경 쓰는 등 뒤늦은 신혼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는 자주 바다를 보러 나갔습니다. 새벽바다 , 아침바다, 저녁바다, 밤바다…….
바다를 모르던 내게 그 때마다 바다는 신비한 빛깔을 보여주며 점점 더 깊이 오묘한 소리까지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고 우리 가족 모두가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부산에는 거의 눈이 오질 않았으므로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며 겨우내 눈 타령을 하던 아들에게 물감을 풀어 정성껏 만들어 준 꼬리연을 겨울 바다에서 하늘 높이 날리는 모습을 보거나, 잔잔한 봄바다 모래밭에서 머리를 맞대고 은하철도 999를 열심히 만들고 있을 때 해운대 달맞이 길로 통하는 기차 터널에서 기적을 울리며 나오는 기차의 모습을 보기 좋아했습니다. 또, 피서 인파가 사라져 간 바닷가에서 머리를 식히며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황혼이 질 무렵 수평선 끝에서부터 내리는 엷은 어둠을 보며 하루를 정리하거나 휘영청 달 밝은 밤바다로 흘러드는 남편의 휘파람 소리를 듣기 좋아했습니다.
코스모스가 한창일 때의 어느 가을날, 달맞이 길을 건너 청사포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해안이 동화 속의 풍경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최초의 바다
이난수
오월의 바다에서
꿈꾸고 있어요
모래톱 사이사이로
은빛 속살이 밀려와요
태초의 바람도
더운 말씀되어
바다와 섞이고 있어요
희디흰 가슴에
물보라 치며
달빛으로 피던 황홀한 바다
금빛 찰랑이는 물결위로
깊은 꿈이
팔베개하고 누워 있어요.


바다에서 돌아 온 어느 날, 서울로부터 인쇄 중이었던 나의 첫 시집 <오늘의 얼굴>이 우송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첫 시집을 가슴에 보듬어 안아 보고, 얼굴에 대보고, 머리맡에 놓고 잠들었습니다.
나는 다시 시작하고픈 학문과 문학에의 뜨거운 정열로 새벽잠을 깨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시문학>을 통해 추천 과정을 거쳐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목마> <절대시> <갈숲> <배토> 동인들과의 교류도 갖고 각종 문학 행사와 학술 모임에도 부지런히 참석했으며 부산일보에도 원고를 썼고 교음사에서 엮는 수필동인에도 참여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부산대학 입구의 여러 서점을 누비며 전공 서적을 사들였고 일부는 서울에 부탁하는 등 하루가 24시간으로 부족한 나날이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남모르게 늦도록 불을 밝혔고 특히 영어 공부 때문에 코피를 쏟기도 했습니다. 새벽 공부를 마치고 창문을 열면 상쾌한 바람과 함께 교회의 종소리를 자주 듣곤 하였습니다.
기도가 쌓이고 쌓인 추운 겨울날, 나는 응시했던 대학원의 합격 통지서를 받고 퍽 기뻤습니다. 뒤이어 남편의 근무지도 서울 본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산과 바다의 조화를 이룬 축복의 도시 부산 ! 조금의 후회 없이 우리의 젊음을 바쳐서 10여년을 일했던 부산에서 다시 이삿짐을 꾸리며 우리 가족은 무척 섭섭했습니다. 바다를 떠나니 비로소 보이는 바다 ! 부산을 떠나온 지 어언 다섯 해가 되었지만 나는 한번도 부산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족이 김해공항으로 향하던 날, 마지막으로 본 낙동강의 저녁노을 빛을 잊을 수 없듯이 내 생애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었던 부산을 고향처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사랑하리라.






어느 날
이난수
가슴이 더운 날 바다에 서면
파도에 밀려오는 목 잘린 언어.
어둠이 깊을수록 이들은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요란한 꿈을 깨고 난 새벽 모래톱에서
나를 향해 웃는 너를 보았다.
그것은 낯익은 금속성의 활자였다가
도라지꽃 곱게 피던 달밤 이었다.
뱀이 나오는 꽈리나무 숲도 있고
잎진 나무 가지 끝에서 우는 까치소리도 있었다.
나를 향해 손짓하는 소리, 소리, 소리.
까치밥 붉디붉은 언덕에 올라 나는 띄우리라.
두고 온 그 바다에 뜨거운 연 하나를......
.
이난수 수필집 <그리운 것은 강물이 되어>중에서

<시인 소개 >

1982년 시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현대시인협회회원, 기독교문인협회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원으로 작품 활동 중이며,
시집으로는 '오늘의 얼굴' , '불꽃 앞에서' , '어느 날 문득'이 있고
시선집 '그리움'과 점자시집 '주님의 비밀'
시 동인집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지상의 뜨락에 피운 노래들’
수필 동인집 ‘사랑이 흐르는 소리’,‘흐르는 눈물을 슬며시 닦으며’가 있으며 문서선교를 위한 50 여편의 <시 사진 엽서 카드>를 제작하여 영어 독일어 일어로 번역 출판하였다.

문서선교의 사명감을 갖고 현재 문화공간 <시인의 집> 을 운영하고 있다.

연락처 592-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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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59266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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