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기
김연자
2003.11.22
조회 169
그리는 노점상

새벽 4시! 아침 밥을 지어 고3 아들의 도시락을 싸놓고 남편이 깰세라 안방에는 불도 켜지못하고 마루에서 비치는 형광등의 불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현관을 나선다.

코끝에 스치는 5월의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것같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걸어내려오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한번 주머니를 더듬어 돈뭉치를 확인한다. 아직도 풍겨오는 담장너머의 라일락의 향기를 맡으며 골목길을 빠져나와 첫차로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으로 가서 메모해온 옷가지를 산다. 묵직한 비닐 주머니 두 개를 어깨에 둘러메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나의 옷가게가 있는 계산동까지 온다. 아직 손님이 덜찬 고속버스속에서 나는 단잠에 잠시 푹 빠진다.
30분의 꿀맛같은 잠에빠져있다가 톨게이트에 주춤 멈추는 느낌이 오면 잠에서 깨어난다. 짐을 어깨에 메고 나의 가게로 들어가 잘 구겨지는 옷가지를 꺼내어 산더미같이 쌓인 옷무더기 위에 펼쳐놓는다. 컵라면 한개를 먹고 칸막이 뒤의 창고로 들어간다 . 시간을 보면 아직 8시30분 전후이다.

창고의 벽에는 몇일전 붙여놓은 노루지가 있다. 크기는 130x162cm(100호) 크기이다 바닥에서부터 한뼘을 띠어서 붙였으니 내키보다 한자는 높다.
4B연필로 뎃생을 한다 소재는 옥수수, 실제 다자란 크기의 옥수수 그림을 채색으로 그리기위한 밑그림이다. 벌써 몇일전부터 나는 살고있는 아파트에서 그리멀지않은 옥수수밭에 이른아침에 나가 스케치북에 몇번이고 옥수수의 뎃셍을 해다놓았었다.
`학상들 가르치는 미술선상님인가봐유, 저리 가면 옥수수열매가 달린놈두 있으니께 그리루가봐유` 고맙게도 옥수수 농사짓는 영감님께서 도와주신다.
내키보다 한자나 높은 종이 끝자락에 그릴때에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야 눈높이가 맞는 것이다. 간판그리는 사람들이 사다리를 놓고 그리듯이 나는 의자위에서 열심히 여러날 뎃생을 하였다. 몇일후 화방에 주문해두었던 캔바스가 왔다 .나무로된 문살에 여러겹의배접을 하고 그위에 장지를 붙인 동양채색을 그리는 동양화 캔바스이다.
자그만치 운임까지 10만원 100호캔바스를 받은 나는 희열을 가누지 못하고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종이만 보고도 감격해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백지캔바스를 처음 대했을때의 기쁨, 그리고 뎃셍이 다되었을때의기쁨, 어느정도 진행되어가는 중도의 아름다움, 또 마무리지어 완성 시켰을때의 성취감, 이런 여러 가지의 행복감 때문에 예술의 세계에 푹 빠지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셔터문 열리는 소음이 나기시작하면 어쩔수 없이 나도 셔터를 올리고 장사할 채비를 한다 새로 가져온 옷을 진열하고 밖으로 수백장의 옷까지 거의 한시간반이나 가게문 열기와 청소를 한다. 한숨 돌리고 앉아있을때쯤 아들의 등교를 거들어주고 약수물을 한통 자전거에 실은 남편이 내려온다.
그리도 잘되던 장사가 IMF 이후 신통치않다. 남편을 앉혀놓고 잠시라도 뒤에 있는는 그림을 만져 볼라치면 `아줌마는 어디 갔어요? 하고 손님들이 꼭 나를 나오게 만드니 아예 장사 할 동안은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주로 새벽 장에 가지 않는날 아침 일찍 내려와 작품에 매달리기를 6개월...붓을들고 그리는 동안기억의 저편에 있던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 처럼 머리속을 스쳐간다.

나는 어려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7남매중 막내딸이었다. 친정집은 그시절로서는 넉넉한 편이었다.
계동 한복판에 방이 9개나있는 디귿자 (ㄷ) 한옥 2층 집에 살았었으니까, 재동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미술반에 있었고 언제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변한적이 없었다. 서울 예고 미술과를 수석으로 입학하였었고 7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 나왔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우리집이 엄청나게 잘사는 줄 알고 어려운 학생에게 그 장학금을 주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3 이 되었을 무렵 우리집은 아버지의 건축업의 고전과 오빠의 사업실패로 나는 미술대학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미술대학이라는 것이 어디 등록금만 간신히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걸 나자신이 너무나도 잘알기 때문이었다.
돈벌 궁리만 하던 나는 어머니께서 분양 받아놓으신 백화점에 나가 열심히 아동복 장사를 하였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살림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탤런트가 된 언니와 나 남동생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지만 병드신 아버지의 치료비와 염치없이도 어머니를 졸라대어 사업자금을 뜯어가는 오빠 때문에 집안은 점점 기울어만 갔다.
내나이 27살 되던해에 병드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그 이듬해에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77년도에 부동산을 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다. 아마도 집 몇채 값은 되는 돈으로 땅투기를 했는데 `토지투기억제정책`에 된서리를 맞아 5년 간이나 땅이 팔리지 않는 답답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동업자인 사람한테 백지 위임장을 써주고 한푼도 받지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돈을 없애고 가슴앓이를 하는 남편은 술만 마시고 건설회사 임시직도 그만두고 뜬 구름이나 잡으려는 사람처럼 될듯말듯한 일에만 매달리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는수없이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고 아들이 6살이 되는 여름부터 나는 계산시장에 나가 양말노점을 시작하였다. 가진 돈은 고작 삼만원, 양말 열두타스를 사올 수 있는 돈이었다. 사과 괴짝위에 양말을 진열해 놓고....그날 그날 생계를 꾸려가면서 살았다. 한편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남편은 주변 하천부지에 온갖 채소를 심어 열심히 농사를 지어 나를 도와주었다. 물론 그채소도 몽땅 내가 자전거에 실어서 시장에 내다 팔아 남편의 용채를 조달 하였다. 그리고 인천시립도서관의 이동도서관 봉고차가 시장근방에 일주일에 한번 오는지라 아이들이 볼 동화책과 내가 즐겨 읽는 소설을 빌려서 보았다.
그 노점은 양지바른 곳..그때 재미있게 읽은 책은 가시나무새, 죽음의키스, 아로운 ,오싱, 가요, 여명의 눈동자 9권, 시드니쉘던의작품, 박범신, 김주영씨의 책은 모조리 빌려다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인천시립도서관으로부터 다독자 상 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가한 시간에는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야채파는 시장 상인들을 연필로 그리기도 하였다.

아줌마들을 그려놓으면 와서 들여다보고 `똑같애 똑같애` 하고 감탄하였다.

그리기도하고 책도읽고 하니 주변 의노점아줌마들이 `그러다가 양말장사 눈빠진다`고 농담을하였다.

한편 딸 아이가 다달학습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6개월에 한권짜리 동아수련장을 사주고는 `5장만 해갖고 와!` 하면 딸은 15장이나 해갖고 노점으로 내려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답맞추기는 내가 해답을 부르고 딸이 시멘트 바닥에 배를 쭉 부치고 동그라미를 쳐 나가는 것이다.


내가 답을 부르면 딸은 동그라미를 쳐 나가다가 틀리것은 깜짝놀라 왜 틀렸는지 자기가 알아낸다. 숙제를 다 하고는 집에 돌아가 어린 동생을 돌보고 밥도 찾아 먹이고, 잘 데리고 놀고.. 또 잠들기 전 까지 Labo라는 영어 교재를 둘이 듣다가 잠이 든다. 동화 식으로 되었는데 영어 한글 복수 언어로 되어있었다. 카셑도 제일 조그만것.. 처음 산것이 신기하고.. 작동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더니 저희들 끼리 영어노래 틀어놓고 잠 들기 전까지는 꼭 듣고 웃다가 소리내어 흉내내다가 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그 동화를 줄줄 영어와 한국어로 외우는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 어린 시절 외운 동화를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있다. 영어는 미국인이 한국어는 구 민 씨와 고 은정 씨의 목소리 였다. 발음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한문 공부는 내가 붓글씨로 크게 100자식 써서 단칸방에있는 미닫이 문에 100자 벽에다가 100자

미싱앞에100자 이렇게 삼백자를 써붙이고 매일 내가 소리내어 읽었다. 그러면 아들이 네살때부터 따라읽다가 어느날 갑자기 줄줄 외우게 되었다. 지금도 방안에서 아들이 네살때 뿅뿅카를 타고 천자문을 달달 외우는 사진을 갖고있다. 아이들이 나중에 중고등학교시절 둘다 한문부장을 지낸것도 그때배운 한문공부때문에 한문에대한 친근감 때문이지 싶다.

비가 오면 노점은 쉬는날 ..아이들은 너무 좋아하고.. 바람이 불면 다른 사람이가게 문짝을 세워놓은 뒤에서 머플러를 푹 쓰고 손님을 기다린다.바람이 불때면 큰 냉장고 박스라도 주워다가 그속에 들어가 있고싶은 생각이 간절 했지만 상점을 가로 막는 다고하여 그럴수도 없었다. 뼈저린 노점생활을 2년 동안 보내고 아주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서 악세사리,수입품가게를 또 이년 하고있을 무렵 점포의 주인이 가게를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길건너 편에 새건물을 짓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가진 돈은 겨우 그새건물 임대료의 10%에 불과했다. 매일 건축공사 하는 것을 바라다만 보고있었는데 잘알고 지내던 미용실 아줌마가 하루 놀러와서 `우리 이제 우리건물로 들어가니 미용실 뺀돈 필요하면 윤경이네가 써` 이러는 것이 아닌가? 정말 꿈만 같았다. 물론 이자돈이긴 했지만 아주 싸게 주신다는 것이었다. 89년 늦은 가을 우리는 미용실아줌마와 가까이 살고있는 둘째언니의 도움으로 지금도 쓰고있는 10평짜리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업종은 계절이 별로 타지않는 `가방` 상호는 `계동가방` 몇 년간 장사가 곧잘 되었다.
아들은 컴퓨터 학원에 보내고 딸은 피아노 학원에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학원비를 줄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고 또 얘기하였다. `지금은 내가 너희들을 학원에 보낸다 마는 이 다음에 너희들이 커서 돈을 벌 때에는 엄마를 꼭 화실에 보내줘!` 라고 했다.

이말을 수없이 해서 어버이날 아이들이 쓴 편지속에 `제가 이 다음에 돈많이 벌어서 엄마 화실을 꼭 차려 드릴께요` 이 문장은 꼭 들어 있었다.> 장사가 그런대로 잘 되어서 가게세를 내고도 빚을 갚아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곧 잘 되던 장사가 어느날 근처에 나들이 백화점이 생기면서부터 급격히 매상이 떨어지고 더군다나 또 다른 가방가게가 코 앞에 생긴 것이다. 궁리 끝에 의류업으로 바꾸기로 하고 또다시 빚을 내어 숙녀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절은 쉴새없이 바뀌고 계절마다 새물건을 수백만원 어치씩 해오다 보니 빚은 산더미 처럼 불어나고 비싸게 가져온 물건은 재고로 남기 일수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빚을 얻을수도 없고 가게를 처분하여 빚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차에.. 나를 새벽 시장에서 데려다 주는 택시 기사한테 사정이야기를 했다.
그런 사연을 갖고 있는 나에게 어느날 새벽 그 기사가 하는 말에 나는 귀가 번쩍 띠었다.

`아줌마! 아줌마네 가게앞 다이 좀 빌려줘요!` `다다구리`(손벽치고 떠들면서 파는 행위) 를 치면 손님이 많이 꼬이고 그렇게 하면 권리금도 더 많이 받을 수 가있지요 !`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시장에서 10년이상 경험이 있는터라 `그러면 차라리 그 덤핑 물건을 나를 줘요. 내가 다다구리를 쳐볼게`그렇게 말하고 몇일후부터 덤핑물건을 사기로 하였다. 돈은 단돈 몇십만원조차 없었는데 때마침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은 학생저축예금 180만원이 있었다. 그 돈은 얼마전에 들여놓은 아들의 컴퓨터값을 지불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15일이 지나도록 수금 사원이 오질 않는 것이었다.

만약 예금을 찾아놓고 그 다음날 수금사원이 왔더라면 고지식한 나는 몽땅 그돈을 내어 주었을 것이었다. 기적적으로 그돈으로 덤핑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땡(덤핑)물건을 사오는 사람들을 땡칠이 라고 불렀는데 그중 유능한 땡칠이를 알게 되었다.

땡칠이가 첫날 바지 150장을 주면서 `아줌마 이걸 가져가서 가만 앉아 있지 말고 떠들면서 팔면 아마 한 70장 정도가 팔릴꺼요`. 라고 말한다.
구입한 가격은 4000원 판매가격은 6000원이다. 나는 물건을 펼쳐놓고 용기를 내었지만 기어들어가는목소리로 말했다.
`6000원이요! 6000원 바지가 한 장에 단돈 6000원! 구경하고 가세요. 살림에는 눈이 보배요. 날이면 날마다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자 입어보고 사세요. 사가시면 오늘 돈 벌어가는 겁니다!` 손님이 하나 둘 모여들어 물건을 뒤적이기시작했다 , 신바람이나자 점점 목소리는 커졌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었고 가게안에는 바지를 입어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바지는 몇시간 만에 바닥이 보였고 총 130장이나 팔려버렸다. 벽에 걸려있던 다른 물건 까지도 다 팔려 버렸다. 94년 2월 말 남편은 제사보러 정읍에 가 있을때였다. 나는 전화를 남편에게 걸었다.
`여보! 빨리 올라와요!. 손님이 너무 많아요!. 나 혼자선 안돼요. 당신이 있어야 겠어요.`
`정말이야? 정말?` 남편은 믿을수가 없다면서 술에 취해 울고 있었다. 바로 몇일전에 점포를 내놓겠다고 했었으니 믿을수가 없을 수밖에.....

남편과 함께 열심히 덤핑장사를 하였다. 매일 매상이 백만원을 넘어 돈세기도 귀찮을 정도 였다. 월소득이 오백을 넘으니 생활비, 가게세, 대학생 교육비, 아들학원비를 쓰고도 월300만원씩 저축이 되었다. 1년 만에 대추나무에 연걸리듯 했던 빚을 다 갚고나니 숨통이 트였다.
하늘이 도운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런 기적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난단 말인가?
그리고 2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방 3개가 있는 아파트를 샀다. 20년 묵은 가구를 몽땅 새것으로 바꾸고 아이들 방에 침대와 책상 옷장을 사주었다. 96년 3월 이었으니 내나이 47살이었다.
단칸 방 밖에 없었기에 나하고 딸은 7년간을 가겟방에서 전자요에 몸을 의지하며 살았다. 딸이 그 방에서 고2 까지를 보냈다. 아들과 남편은 단칸방에 자고 아침이면 나만 부산하다. 딸의 도시락 싸놓고 집으로 가서 아들의 도시락 싸고 별거아닌 별거생활을 7년이나 했었다.

이제 집을 샀으니 안방을 부부의 방으로 쓰게되어 좀 어색하기도 하여, 아들에게 `우리 아파트에 이사 가도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방을 쓸까?` 하고 물으니 중3 아들은 `아니요. 어머니 하고 아버지가 안방 쓰세요` 하고 말한다. 돈벌고 집을 사게되어 7년만에 신혼 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추한 곳에서 살다보니 깨끗한 아파트가 나의집이란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남의집에 잠시 얹혀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이게 내집인가? 하는 신기함이 무려 육개월이나 갔다. 남편은 하도 새집으로 이사를 오지않아서 내가 데리러 갔다. `싫어, 싫어. 그집은 내집이 아니야 김연자네 집이야. 난 여기가 편해.` 이러면서 오질 않았다.
곧 헐리게될 집이어서 모두들 이사나가고 으시시한 집에 혼자남아 술을 마시고 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벼개를 들고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무슨 마음에서 였을까? 자기보다 내가 애쓴 것이 미안 해서 였겠지...

그렇게 장사가 잘 되기를 4년이 지나고 IMF가 왔다.

비상금 까지 통장에 두둑 하니 겁날것이 없었다. 손님이 뜸해지자 나는 한시도 잊은적이 없는 동양화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고 홍대교수 친구에게 상의를하였다. 홍대로 동양화 공부를 다니기로 한것이다. 5개월 이나 기다리고 기다려서 9월 3일부터 홍대에 첫 수업을 하러가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뜻하지않게 9월 2일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새벽 6시에 119를 타고 인하대학 병원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7시에 검사와 함께 수술로 들어갔다.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이 순조롭게 되어 목숨을 구사일생으로 건지고 남편은 중환자 실에 누워 있었다. 누워있는 환자에게 물을 떠먹이면서 나도모르게 중얼거렸다.`내일 홍대에 가야 하는데... 아마도 미술공부 하지말라는 신의 계시 인가봐요`라고 했드니 뜻밖에도 남편이 `당신 내일 학교 갔다와! 첫날인데 빠지면 어떻게 해. 어차피 중환자실 보호자는 밖에 있어야 하니까, 점심만 간호사 한테 부탁하고 학교에 갔다와!` 나는 너무나도 머리속이 혼란했지만 그 다음날 학교에 갔다. 9월 오후의 뜨거운 태양은 내리쪼이고 특히나 신촌은 왜 그리 덥던지..

준비물 가방을 들고 벌건 얼굴로 익숙치 않은 버스정거장을 헤매는 나는 꼭 미친 사람만 같았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미쳤나봐! 아빠는 중환자실에 눞혀놓고...` `엄마! 미쳐야 뭐가 되는거야!` `미쳐야되`

돌아오는 전철속에서 남편과 딸이 고마워서 남몰래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다. 홍대에서 채색을 1년 배우고 국전에 출품하려는 욕망으로 100호짜리를 그리게 된것이었다. 난 자가용도 없고 왕복 7만원의 작품 차량비를 쓰기도 아깝고 해서 오직 나홀로 옷가게의 창고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마다 작품에 매달리기를 6개월 그동안 남편은 아침식사를 물론 혼자 하였지만 한번도 불평하지않고 나를 격려 하였다. `당신 작품이 최고야!` 남편도 채색화에 빠져있었다.
99년 10월 50살이되는 내 생일날 나는 제18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을 하였다. 작품명은 `해질녘` 노을진 하늘밑에있는 옥수수밭의 풍경 이었다. 몇일후 새벽 신문에 난 발표를 보고 나는 소리쳤다.

`여보! 합격이야! 합격!` 남편이 자다말고 마루로 뛰어나와 우리는 부둥켜 안고 소리내어 울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동명 2인이 아닐까? 아침 9시가 지나 미협으로 전화를 걸어 접수번호까지 확인하고 그때서야 형제 자매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소식을 알렸다.
경사가 겹쳐 아들이 연대에 특차 합격을 하였고 그 이듬해에 경기미전에 인물화로 특선을 하고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이 되었다.

점점 의류경기가 없어지고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의류업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되었다.`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든 밥이되든 죽을 때 까지 그림이나 그려보자!` 하고 남은 옷을 몽땅 쎄일해서 가게를 비웠다.

유리문을 다 열어젖히고 나는 빈 가게에서 마음 놓고 큰 그림을 그렸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구경을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옷장사 아줌마가 웬일 입니까?` 그리고 가르쳐달라고 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오게되었다.

나는 `열린 미술 교실` 이렇게 써붙였다.

옷장사로 꾸려가던 살림은 어느듯 수강생의 수업료로 꾸려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학졸업을 앞둔 딸이 40만원이나 하는 컴퓨터 학원에 등록을 한다고 한다.
안그래도 그림 공부 하는4년 동안 돈도 많이 썼고 재래 시장의 불경기로 딸의 졸업만 기다리던 나에게 딸은 대학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더군다나 고액의 학원까지 가겠다고 하는 것이 너무 에미 사정을 몰라주어 야속하기 까지 생각이 들었다

`너 컴퓨터 학원 등록하면 안돼, 말안들으면 가만놔두지않을꺼야!` 하고 악을 썼는데 나간지 한시간도 채 되지않아서 `엄마! 나 대학원 학비 장학생 됐어요! 2년간 전액 면제!` 이러는 것이 아닌가! 아들이확인차 internet 에 들어가 서 찾았다. `누나 나왔어요!.` 이게 웬일입니까? internet page 에 학비 장학생으로..확실하게 나와 있었다.

70세 연세인 엄마 같은 큰 언니에게 메일로 소식을 전하는데 눈물이 흘러내려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온 집안이 경사가 겹쳐 축하받기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요즈음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 살아있는 동안 좋은 작품을 열심히 그려 놓아야지...
매일 매일 이렇게 그림을 그릴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남편은 나의 재료구입과 표구를 맡아서 기쁜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느라 바쁘다.
나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는 그림을 그려요! 죽을 때 까지 그릴꺼예요! 내가 죽고 100년후에 내그림을 알아 줄지라도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겁니다!!!`

2002년 5월5일 전업작가 김연자

인천시 계양구 계산1동 753번지 서해그린아파트1동4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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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계양구 계산1동955-19 열린미술교실(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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