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9년 10번째 이사
김경석
2004.06.13
조회 165

결혼 9년 10번째 이사

95년 10월 3일 오곡이 무르익어 가는 가을 초엽에 우리의 사랑도 무르익어 결혼을 하였다. 당시 나는 신학교 4학년으로 서초동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겠다는 꿈과 소명을 이루고자 작은 가방하나 들러 메고 상경하여 11살 위의 형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기에 빨리 가정을 이루어 독립도 하고 안정도 찾고 싶었다.
교회의 배려로 결혼식은 교회 예배당에서 하고, 피로연도 여전도회 도움으로 교회 교육관에서 하였다. 사진촬영과 신혼여행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고, 예물도 혼수도 없이 최소의 경비로 결혼식을 치뤘다. 이런 우리의 결혼 이야기는 과다한 결혼자금과 혼수문제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앓고 있던 시절에 '단돈 백만원으로 이룬 보금자리'라는 제 하의 기사로 교계 신문에 미담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미담에도 현실은 가난한 신학생에게 그것도 강남의 높기만 한 집세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두터운 벽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교회 창고를 개조한 1평 남짓한 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화장실도 주방도 교회 것을 같이 사용해야 했는데 평일에는 교인들의 방문이 많질 않아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주일에는 우리의 삶이 다 노출되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달콤한 꿈같고 아기자기한 소꿉장난 같던 신혼도 잠시, 우리 부부에게 시련이 너무 빨리 다가왔다. 젊음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재산 삼아 결혼하였지만 현실은 너무 냉혹하였다. 교회 주방 사용 문제 등으로 몇몇 여자 교인들이 입방아를 찧더니 아내와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설상가상 가을에 결혼하였으니 매서운 겨울은 곧바로 따라왔다. 전기장판을 깔고, 두꺼운 이불을 덥고, 신혼의 열기를 더해도 방은 춥기만 하였다. 조금 과장하면 방안에서도 콧 털에 고드름이 맺힐 정도였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우리 부부는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방을 보러 다녔다. 그때 우리 수중에 있던 자금이라곤 결혼 축의금으로 들어온 200여 만원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그 돈으론 시내에서 단칸 월세 방을 얻기도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생활정보지에서 700만원이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4500만원짜리 집을 장기융자, 단지융자, 회사채를 끼고 입주금 700만원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구경하니 우리가 신혼을 시작한 창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둘이 젊으니 열심히 벌면 이자도 내고 빚도 갚고 나중에 집을 팔아 교회 개척자금으로 쓰자는 야무진 꿈과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 부탁하여 입주금을 준비하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결혼 후 첫 이사를 하였다. 모든 것이 여호와 이레, 만사형통만 같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내의 임신과 유산이 그것이었다. 빚으로 집을 샀기에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과로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 유산 후 아내는 우울증 증상까지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야심찬 계획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97년 초 아내는 첫 아이를 출산하였고,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잠시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IMF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고, 우리의 수입은 거의 바닥이었다. 심지어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며 아이의 분유 값을 염려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전세로 내놓고 저렴한 월세 방으로 옮겨 이자부담을 줄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찾은 집이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축사를 개조하여 만든 집이었다. 축사에 한쪽은 방을 만들어 놓고, 한쪽엔 알루미늄 샤시로 각종 문을 제작하는 공장을 만들어 놓았다. 외진 시골 같은 곳이라 공기는 좋았지만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으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옆의 공장에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쇠를 깎는 소음이 그치지 않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이사 후 아내는 휴일도 없이 때로는 주일에도 일을 해야 했지만, 나는 학업과 아이 육아를 핑계로 별다른 수입이 없었다. 그러니 형편이 나아지는 커녕 오히려 이자만 늘어갔다. 상황이 그만하니 아내와 처가로부터 가족을 고생시키는 무능한 가장으로 낙인찍히고 '학업을 중단하고 아기 분유 값이라도 벌어 오라'는 등 비난과 조소를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도 일을 해야했다. 학교 수업이 없는 시간엔 학원강사를 하고, 주일엔 교회 사역 등 1인 다역을 감당했다.
그곳에서 1년 남짓 있다가 사역지를 따라 또다시 수원시로 이사를 하였다. 그렇게 저렴한 집을 찾아 사역지를 따라, 창고에서 새 집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이사를 거듭한 것이 결혼 8년 4개월만에 9번이었다. 어떤 집에서는 추위에 떨고, 어떤 집에서는 곰팡이와 매캐한 냄새로 힘들어하고, 어떤 집에서는 폭우에 빗물이 집으로 들어와 빗물을 퍼내느라 몇날 며칠을 새우잠을 자며 고생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나는 신용불량자까지 되어 한없이 추락해 있었다. 때문에 요사이 신용불량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는 아내대로 어린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과로로 지쳐 쓰러질 정도로 생활고와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빚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만 갔다. 아내와 나의 불화는 심해졌고, '이혼'이란 단어도 수없이 언급되었다. 도무지 우리 앞에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절망뿐이었다. 나는 만성적인 두통을 앓게 되었고, 아내는 위경련으로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까지 겪었다. 이런 연단을 통해 나는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지게 되었고, 하나님께 절박하게 매달리며 기도하게 되었고, 가난한 자들의 아픔과 힘든 세상을 조금씩 배워가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초 나는 부교역자 생활 13여 년 만에 부목사로 있던 교회의 도움과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개척이라는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다. 수많은 이사와 물질적인 연단으로 지쳐있던 아내는 처음에는 심하게 반대를 하였지만, 결국은 주님의 부르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들은 자녀교육 때문에 서울 강남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목회를 위하여 강남에서 인천으로 다시 왔다. 수년 전 희망을 가득 머금고 들어와 실패의 눈물을 흘리며 떠났던 이곳에서 나는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희망을 이루겠다고 다짐해 본다.
인천으로 너무 갑자기 오게 되어 거처를 제대로 구할 수 없어 우리는 지하 월세 방을 임시 거처로 얻어 거하다가 또 10번째 이사를 앞두고 있다.

이사를 거듭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짐을 다 풀지 않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짐들은 이사할 때 묶은 그대로 놔두고, 가급적 짐을 늘리지 않고 불필요한 것들은 줄여나가고 있다. 언제 또 이사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또한 잦은 이사를 통해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안주할 거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는 나그네길이라는 것 몸으로 터득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들처럼 영원히 거할 약속의 땅을 찾아 순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그래서 가급적 세상에 애착을 두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영원한 이사를 잘 할 수 있도록 저 하늘의 집 준비를 잘 하려고 한다. 그곳에는 다시는 이사하지 않아도 될 영원히 거할 집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얻기까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는 나의 나그네 길 방랑은 계속 될 것 같다. 언제까지 우리의 이사가 계속 될지, 몇 회로 최종마무리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는 날에는 그 결론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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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용불량과 각종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리며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 썼습니다. 상담이나 기도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 또는 ***-****-****로 연락주세요. 위하여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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