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부부의 세상나들이-목회간증수기
신현귀
2004.10.29
조회 189
“목회자 부부의 세상 나들이”
(2004월간고신 수기공모 대상수상작)



“여보! 나....... 당신께 부탁하고 싶은 소원이 한 가지 있는데요.”
“......”
“지금 당신에게 말해도 괜찮겠어요? 그리고 들어주실 거지요?”
아내의 얼굴을 보니 평소와 같은 밝고 명랑한 표정이 아니었다. 항상 아내는 사람들이 보기에 마치 제비꽃처럼 함초롬한 예쁨으로 다가가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뭔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해 보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이날따라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그래? 당신의 부탁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요.”
그런 아내의 분위기에 압도되듯이 나도 모르게 한 마디 불쑥 내뱉었다.
“다름이 아니라 결혼 이후 지금까지 줄곧 당신의 목회 뒤편에서 그저 기도하고 당신을 지켜보는 것이 고작 내가 할 일이었어요. 지금 제가 보니 교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 당신이 곤궁에 처해 있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뭔가 조그만 물질적인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해서요.”

지금 교회가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해 양천교회와 목동제일교회를 합쳐 ‘하나로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40·50 여명이 되어 제법 많은가 싶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이사 가고, 결혼하고 해서 성도들의 숫자는 감소를 거듭하더니 1년 반 만에 겨우 10여 명 남짓 남았다. 당시 교회는 목동 사거리 대로변에 있었는데, 앞에는 편도 4차선 도로, 우편에는 곰달래길, 좌편에는 경인고속도로, 그리고 뒤편에는 유흥가 밀집이라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매 주마다 성도들과 열심히 전도해도 오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하루가 멀다하고 성도들은 자꾸만 줄어드는데다 임대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꾸 오르는 까닭에 마음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했다. 마침 주위 목사님들도 ‘목사님, 그곳은 지역적으로 전도되는 곳이 아니라 성도들이 빠져나가는 곳이니, 교회를 다른 곳으로 빨리 옮기라’는 조언을 하곤 하셨다. 그래서 지역적인 특성을 탓하며 공동의회에서 일단 교회를 이전하기로 가결하고 우여곡절 끝에 강서구 등촌3동 주공 10단지 내 조그만 상가 지하를 사채와 은행융자를 받아 구입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내 생애에 긴 터널과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족까지 포함하여 10여 명 밖에 안 되는 성도들과 함께 높은 사채 이자에 은행융자를 감당하며 교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남아있는 성도들 중에는 교회의 어려운 재정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힘이 될 정도로 헌금 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매 주일마다 새로운 성도들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너무 가난한 영구임대 아파트지역이라서 사실 경제적으로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새벽에도 10여 명 많게는 20여 명 가까이 나와서 기도하지만 그들이 나와 주는 것만으로 위로받아야 했다. 시작은 보기 좋게 믿음으로 추진했으나 현실적으로 남은 것은 빚 - 경제적인 어려움뿐이었다. 눈을 떠 보면 천길만길 낭떠러지 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몸부림을 쳤다. 용산에 가서 컴퓨터 부품을 사다가 조립하여 목사님들에게 납품을 하면 조금씩 주시는 수고비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헌금이 통 들어오지 않으니 사채 이자는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가고, 은행은 하루가 멀다고 독촉이 오고....... 어느 날 마침내 한일은행에서 최고장이 날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봐줄 수 없으니, 채권단에 넘겨서 법적인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을까요? 왜 내겐 돈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붙여주지 아니하십니까?’ 날마다 기도한답시고 푸념 아닌 푸념만 늘어놓았다. 목회의 마지막 위기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내는 목회인생의 만루위기에 처한 내게 구원투수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아내의 간절한 부탁은 귓가에 황당한 소리로만 들려왔다. 왜냐면 아내는 고등학교, 신학교를 거쳐 곧 바로 결혼한 터라, 사회생활 한 번도 하지 않고 사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다던가, 아니면 조그만 구멍가게나 양품점 같은 사업이라도 해 본 경험이 있으면 모를까. 어떤 때는 사례비를 주면‘이것 가지고 어떻게 생활하느냐?’하면서 애들처럼 생활비 적다고 투덜대던 아내가 아닌가? 어이없다는 듯이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물었다.

“나를 어떻게 돕겠다는 말인데요?”
“좌우간 어떤 부탁을 해도 들어주실 거지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끄덕였다. 교회의 심각한 재정적인 상황도 상황이지만 남편을 돕겠다는 말과 함께 아내가 어떤 부탁을 할 건지도 사실 속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나, 거리에 나가서 장사 좀 하고 싶어서요.”
“어떤 장산데?”
“홍화씨요. 아무데나 나가서 홍화씨 좀 팔아보고 싶어서요.”

아내의 말인즉 교회 여선교회 회장이 ‘홍화씨’라는 것을 판매하고 있는데, 부탁해서 자기도 좀 구해다가 판매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아내는 진즉부터 남편 모르게 여선교회 회장에게 ‘홍화씨를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졸라대듯이 부탁해 왔고, 사모의 거듭되는 요청에 견디다 못해 여선교회 회장은 목사님에게 허락을 받아오기 전에는 절대 도울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홍화씨를 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굳게 결심하고 그렇게 말을 던진 것이다.

그 무렵,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 앞에서 마지막 비상수단으로 40일 금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하나님은 감옥과 같은 지하교회에 나를 깊이 쳐 넣으시고 물질의 궁핍함으로 연단하고 계셨고, 지금 그 연단의 수위를 더욱 높여가고 계시는 중이셨다. 돈이 많으신 분들이야 ‘그것이 무슨 연단이냐?’고 하겠지만 분명 내게는 강도 높은 연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떼를 써 볼 심산이었다. 아내의 부탁과 40일 금식을 두고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고민과 갈등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이 주님의 뜻입니까?’ 날마다 재촉하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결론을 내려고 일단 가족회의를 열었다. 중학교 다니는 큰 딸, 둘째 딸, 초등학생인 막내, 이렇게 다섯이 모여 투표한 결과 찬성은 오직 한 사람 - 아내뿐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며칠만 시험적으로 판매해 본 후 장사가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만 두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내가 홍화씨를 판매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가게를 얻을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교회 빚이나 갚지....... 12월 어느 날 어딘지도 모를 장소에서 판매할 홍화씨를 차 트렁크에 가득 실었다. 그리고는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오직 교회 일에만 파묻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온 미지의 세계로 아내와 함께 무작정 떠났다. 얼마 후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우글우글한 어느 대로변 한 귀퉁이에 혹이라도 누가 날 알아볼까봐서 아내와 홍화씨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나 만나서 이때까지 남들도 다 입어보는 새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히지도 못하고 그렇게 고생만 시키더니, 이제는 길가에 아예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돌아오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날따라 왜 그리 날씨는 을씨년스럽게 춥고, 하얀 눈은 펑펑 쏟아져 내렸는지. 그날 눈에서 펑펑 쏟아져 나오는 내 눈물은 함박눈이 되어 온 세상 위를 가득 덮었으리라. 아내와 첫 세상나들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홍화씨를 판매하기 위해 길로 나섰던 첫 날. 아내는 고사리(?) 같이 여리디 여린- 한 번도 힘든 일이라곤 해 보지 않은 손에 2만원을 쥐어들고 왔다. 겨우 홍화씨 2되를 팔아 2만원을 벌어 온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결혼 후 자기 손으로 처음 번 돈이라서 그런지 그런 대로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다음 날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어제와 같은 장소에 내려주고 돌아왔다. 노점상이라지만 막상 장사를 하려고 하니, 기존 노점상들의 텃새가 만만치 않았다. 빈자리 좀 잡아서 장사하려고 하면 옆에 있던 기존 장사치들이 이리저리 밀쳐내어 못하게 방해하고, 모처럼 홍화씨를 사기 위해 손님이 붙으려고 하면 구청에서 단속 나와 도망가기 바쁘고....... 이렇게 해서 하루 온 종일 추위에 덜덜 떨면서 겨우 3만원을 벌어왔다. 아내의 손은 세상의 인정마저도 얼어붙은 매서운 추위에 꽁꽁 얼어 있었다. 차마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내 영혼의 흐느낌은 휑하니 텅 빈 겨울 하늘을 찢어놓듯이 메아리치고, 내 마음은 이미 눈물의 깊은 강이 흘러 그 눈물이 모여 넓은 바다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아내는 얼마나 가슴 설렜던가. 아내는 남편이 어느 누구보다도 목회를 능력 있게 잘 할 거라 믿고 있었는데 무능하고 못난 남편 만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도 못한 노점상을 하려 나섰다니....... 아내는 지금 남편을 돕기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거친 욕도 서슴없이 내뱉고 때론 멱살잡이에 싸움질마저도 다반사인 치열한 삶의 거리에 제비꽃 같은 가냘픈 모습을 드러내 놓은 것이다. 아내의 얼굴을 살짝 훔치듯 쳐다보니 여간 실망한 빛이 아니다. 왠지 마음속으로는 ‘참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그만 둡시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싶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산다 하지 않소.”
“목사님, 한 번만 더 나가 보겠습니다. 내일은 다른 곳으로 데려다 주세요.”

아내는 결심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에 컴퓨터조립 관계로 잘 다니던 용산에 마지막 가보기로 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아침부터 일찍 준비하여 정해 놓은 장소도 없이 용산전자상가 쪽으로 차를 몰고 떠났다. 그리고 어느 길모퉁이 - 무언가에 쫓기듯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횡단보도 부근에 아내와 짐을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예전부터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핫도그집이 있다. 핫도그 집이라야 가판대인데, 그 아줌마는 마음씨가 착하긴 하지만 한 번 마음이 틀어지면 마음 풀기까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는 구두 수선하는 가판대가 있는데, 이 사람은 용산일대에서 자기 나름대로 그 세계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지역 조직폭력배들과 맞설 정도로 뱃장도 있었다. 차에서 짐을 내려놓자 이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쪼아보고 있었다. 낯 설은 이들에게 겁먹은 듯 조심스레 다가가서 아내가 말을 걸었다.

“아줌마, 이 앞에서 장사 좀 하려고 하는데....... 하면 안 될까요?”
한참 동안 뚫어지게 위 아래로 훑어보고 째려보고 쪼아보더니 한마디 던진다.
“마음대로 하슈~”

이 후로부터 여기 세상 모퉁이 한 곳에서 아내와 나는 3년이라는 세월을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그리고 세상 밑바닥에서 찌들대로 찌든 그들의 등쌀을 견디며 지내야만 했다. 우리 오기 전까지는 그 동안 아줌마가 운영하는 핫도그집 가판대 앞에서 장사해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단다. 아줌마가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쫒아 내버린 것이다. 그러니 말이 삼년이지 그 세월이 오죽했을까? 물론 그 아줌마에게도 좋은 점이 많이 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 아파하는....... 그래서 아내에게 선뜻 허락해 버린 것이다. 나중에야 아줌마가 허락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곳에 물건을 내려놓는 새댁을 보니, 옛날에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 마음이 아파서 허락했수~"

차에서 물건을 주섬주섬 내려놓은 후 세상 모퉁이 한 곳에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일 듯 말듯 조그맣게 좌판을 벌여 놓았다. 잠시 사람들 사이로 도망치듯 빠져나가 주차시키고 그곳에 와 보니 벌써 아내는 열심히 홍화씨를 팔고 있었다. 평소에는 성격이 소극적이라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그 힘과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관심이 있는지 아내 주위로 몇 겹이 뺑 둘러 서 있었다. 아내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이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너도나도 홍화씨를 사 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온 홍화씨를 몽땅 다 팔아버렸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아내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큰 돈을 자신의 수고로 벌어서 처음으로 만져 본 것이다. 용산에 처음 다녀오던 그 날 밤 아내는 피곤하여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몸은 고달팠겠지만 남편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잠을 잤으리라.

아내는 평소 몸이 너무 허약하여 반나절을 누워서 지낼 정도였다. 처음 개척을 시작할 즈음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도, 사람도 없이 무모하게 개척하다 보니 먹을 것조차 없는 날이 태반이었다. 먹을 것 먹지 못하니 아내의 몸은 퉁퉁 불어버린 식은 라면처럼 날마다 부어있었다. 임신하여 먹고 싶은 것 많아도 남편에게 한 마디 내색도 못하고 그저 사택이 붙어있는 예배당 한 구석에서 홀로 흐느껴 울 뿐이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퇴원하던 날에도 병원비가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만 했다. 출산 후 몸조리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그저 먹어보고 싶은 것 한 번이라도 실컷 먹어 봤으면 한이 없으련만 제대로 먹지 못하니 부기가 그대로 남이 있고, 몸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껍데기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후 아내는 하루가 시작되면 한나절은 그냥 멍하니 누워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남들이 한참 활동하는 오후 시간이 되어서야 그나마 겨우 일어나서 움직였다. 어느 날 병원에 가 진찰해 보니 먹지 못해서 오는 악성 빈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몸으로 추운 겨울에 그것도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인정머리라고는 전혀 없는 찬바람과 싸우면서 장사를 하고 돌아왔으니 피곤이야 말할 수 없으리라. 아내의 기력은 물거품처럼 아침에는 보글보글 일어났다가 밤이 되면 어디론가 스러지는 그런 거품이었다.

용산에 다녀오던 날 밤 나는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지금까지 날마다 돈에 쪼들려 목회다운 목회 한 번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다. 눈만 뜨면 돈 걱정하다가 밤이 되면 강단에서 지친 몸을 내 맡긴 채 잠이 들곤 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그래도 목회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제 정말 목회도 못하고 홍화씨 장사나 하나 보다. 홍화씨 목사? 홍화씨 목회? ‘주님. 이 어찌 된 일입니까? 홍화씨나 팔라고 저를 부르지는 않으셨잖습니까?’밤새도록 주님께로부터 무언가 한 말씀이라도 기대했는데 그 분은 그 밤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내내 침묵만 하셨다. 내 마음은 정말 태산이 짓누르듯 무거워져만 갔다. 이렇게 해서 아내와 나는 홍화씨목사 부부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새벽과 저녁에는 교회 일을, 낮에는 홍화씨를 팔기 위해서 세상을 부지런히 넘나들며 세상 나들이를 시작했다.

새벽이 되면 겨우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는 것으로 고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노점상을 하면서도 성도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새벽기도회나 심방, 수요기도회에 소홀함이 없도록 목회하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택에서 교회까지의 거리는 6Km 정도로 떨어졌는데, 겨울이 되면 전날의 얼어붙은 몸이 채 녹기도 전에 곤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고행이었다. 아내와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 훈련’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새벽기도회에 다녀오면 우선 부지런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그 때부터 세상나들이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미 아침부터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어찌 비교할 수 있으리오? 겨울에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폭군처럼 휩쓸고 달려가는 매서운 바람, 여름에는 태워버릴 듯이 내리쬐는 태양열에 달구어진 아스팔트에서 품어내는 뜨거운 열기, 그리고 생긴 것은 반반한데 어찌 저렇게도 제비꽃처럼 함초롬한 아내를 길거리에 내동댕이쳐 버렸냐는 사람들의 비웃는 듯한 따가운 눈초리에 하루를 힘들게 견뎌나가야 했다.

도회지에서 특히 서울에서 돈 없이, 도움 없이, 사람 없이 개척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돈이라도 있거나 도와 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쉬운 편이다. 교회 형편이 어려워 큰 맘 먹고 비교적 안정된 교회에 도움을 청하러 찾아가면 거절당하기 일쑤다. ‘서울에서 개척할 정도면 돈이 없겠느냐?’는 것이다. 거절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말문을 꺼내기도 전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본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먼저 꺼내 아예 입을 봉쇄해버리거나, 찾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엎드려 열심히 기도하라거나, 그렇게 찾아다니며 사람 의지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책망한다. 그리곤 교회의 상황이 문 닫을 정도가 되면 ‘기도만 하고 있으면 누가 알겠느냐? 주위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이야기해야지!’ 라고 점잖게 충고를 잊지 않고 한다. 이것이 나와 아내가 홍화씨를 팔려고 거리로 나선 또 한 가지의 이유이다. 비록 길바닥에 힘없이 버려진 노점상이긴 하지만 교회를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도하고 내 손으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아내는 처음 홍화씨 판매를 시작할 때 3년만 하겠노라고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홍화씨 판매를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이렇게 3년 동안 아내와 나는 주일 외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아무도 모르게 교회 살리기에만 전념하였다. 3년의 기간이 차가자 아내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더군다나 아내는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조차 힘든 악성 빈혈이 아닌가? 빚 갚으려고 노점상을 계속 하다간 오히려 더 큰일 날 것만 같았다. 아직 갚아야 할 부채가 많이 남아있지만 우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한 3년의 세상 나들이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왔다. 홍화씨를 판매하기 위해 길거리 노점상으로 나선 것을 굳이 ‘세상나들이’라 표현한 까닭은 정처 없이 떠나는 머나먼 길도 아니요, 볼 일만 잠깐 보고 돌아오는 외출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는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여보, 내가 당신의 목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나요?”
“당신은 만루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준 고마운 목회의 구원투수예요.”

아내는 내가 목회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만루의 위기에 나와서 나를 도와주는 훌륭한 구원투수이다. 홍화씨 판매는 나로 하여금 목회에 있어서 사모인 아내의 중요성을 새삼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슴 아픈 ‘세상 나들이’는 비록 여기서 끝이 났지만 결코 나 홀로 걸어갈 수 없는 목회를 향한 새로운 동행을 이제 아내와 함께 시작한다. 함께 울고 웃으며 목회를 감당할 수 있는 동역자인 아내가 항상 곁에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연단하시는 주님의 손에 이끌려 서로가 진정한 영적 동역자임을 거듭 확인해 본다. 그리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개척의 현장으로 또 다시 동역의 힘찬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내와 나는 요즘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추신 :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와 목사님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길 원하는 마음으로 보내 봅니다. 저희들의 몸부림이 그분들에게도 격려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하나로교회 담임목사 신 현 귀
주소 : 서울 강서구 등촌2동 512-15 한신빌딩 7층 하나로교회
전화 : 2061-4336(교회), 2648-4336(사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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