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과 그리고 이 시대의 아픔 때문에....
저는 용산 역전의 그리 크지 않은 노숙가족의 쉼터를 인도하는 유수영목사
라는 사람입니다.
제 지난날의 이야기가 세상에 따뜻함을 더 할 수 있을까 해서 잠시 선생님
의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48년 4월 금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이 그곳
군수를 잠시 근무하셨던 관계로 그 곳 기억은 전혀 없으며 이후에도 고창,
전주, 김제 등으로 전임하셨기에 초등학교를 다섯 군데 거쳐서 마쳤습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 주변과 얼른 동화되기가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장발쟝(축소판)을 잠시 보고는 그 내용에 몰입
하여 무려 가격이 다섯배 나 된 만화책(만리종)을 바꾸고는 읽고 또 읽고 했
던 일이 있습니다.
부친이 공직에서 퇴직하신 후 김제로 이사 왔는데 그 때부터 저희 집은 어려
움이 시작된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읍내 끝 마을에 살았던 관계로 장날
되면 시골에 아기 들쳐 업고 뜯은 나물을 팔러오는 시골 아주머니들이 밤늦
게 가끔 있었는데 어느 날 마루에서 저녁식사시간에 아이를 이끌고 한 분이
오셔서 물 한 모금 얻고자 청했다가 남은 밥을 또 청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린 생각에 내가 밥을 덜 먹으면 저 아줌마가 배고픔을 면 할 수 있
을 것이란 생각에 얼른 밥맛이 없다고 수저를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
에게 더 밥을 많이 먹여주시는 아줌마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누
구엔지 감사를 드린 일도 있습니다.
중학을 마치고 저는 이웃도시인 익산의 남성이란 고교로 진학했습니다.
집안이 어려웠던 탓에 큰집에 1년을 얹혀살았고 한참 성장기에 쪽방 구석에
서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고3때 월남경기가 있어 두 분 형님이 가서계신 탓에 잠시 하숙
생활을 했습니다. 정말 꿈같은 세월이었으며 그것을 누리느라 공부를 등한
히 합니다.
1년을 재수하여 정말로 하늘에서 주신 행운으로 연세대 공대로 진학했습니
다.
두 형님께서 귀국하셨고 집안재정은 소강상태였다가 부친의 고집으로 인하
여 겨우 생긴
집이 남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저의 20대는 어두운 회색빛 겨울하늘 같았습
니다.
대학생활은 목적없는 방황으로 인해 불량한 성적만을 남기고 26세에 입대
하였으며
제적은 거의 기정사실임을 확인한 채로 절망적인 병영생활은 시작되었습니
다.
그러다가 제 생활을 유심히 관찰하시던 두 분 교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구제되었으며
저는 그 때부터 제 삶이 아닌 여분의 인생을 살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
다.
77년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이어 7년 동안 사귀던 자매님과 결혼하였으
며 이어서 굴지의 건설회사인 H사에 입사했습니다. 정말 내 시대가 왔구나
는 마음으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중동현장에 나갔다가 더욱 더 진가가 발하는 제 존재
로 인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시절이었으나 한 순간의 착각으로 현지업자가 쥐어주
는 작은 물질
때문에 잠간의 삶이 불안에 빠졌고 이어 술자리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인하
여 근로자가 휘두른 톱에 이마를 맞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귀국했고 그리
고 1년 만에 사직을 합니다.
제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지만 자랑할 것도 보람된 것도 그 어느 것 하나가
없었습니다.
보람 있는 생이 그 당시 저의 꿈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으로 강남 집을 날리며 하던 사업도 정리하고는 기독교에 귀의했습니
다. 기왕이면 확실하게 하자는 마음으로 신학교도 입학하여 3년간 공부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특기 때문에 여기저기 환대를 받으며 교회모임에서 사역을 했으
며 비록 넉넉지는 않았어도 새로운 세계에서의 꽃피우는 시대가 다시 온 것
으로 다시 제 신앙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되어서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광주 오포면
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으며 설상가상으로 IMF가 찾아와 끼니 잇기가 어
려워지게 됩니다.
갑자기 찾아와 눌러앉게 된 한 장애형제가 모금해온 것으로 한해를 버틴 일
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 형제들에게 가라. - 어디 있는 형제 말씀
입니까? -
서울 역에 가보라.“ 가서 보니 2천여나 되는 노숙형제가 있었고 그 모양이
비참하기는
한 데 저도 같은 형편이라 도울 힘이 없는 저는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습니
다.
그래도 그 날부터 그 형제들 옆에 있기 시작했습니다. 3박4일 전원수양관에
서의 행사,
매주 하는 화목집회, 쪽방얻어주기 등을 2년여 하다가 용산역전 지하실 작
은 쉼터교회를
개설했습니다. 사회 인사들께 후원을 요청하면 왜 그런 사람들을 돕느냐고
야단을 맞았으며, 형제들을 인도하면 술 취해 들어와서 당신이 얼마나 성자
인지 한번 견뎌보라면서 기물을 부수는데 2년을 하다가 간경화로 쓰러졌으
며 혀도 굳어져서 3개월여 목회도 쉬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희망을 상실했습니다. 죽지 못해서 산 해가 2004년도 봄입니
다.
그런데, 그 해 6월 갑자기 또 음성이 들립니다. 중국에 가라는 말씀이었습니
다.
아무 생각 없이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동북지방에 갔습니다.
거기서 제가 제 생의 마지막 해야 될 일을 찾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농촌을,
농민을 부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간
구했더니 중국인민들의 심정이 되어서 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떠올랐습
니다. 계획서를 작성, 중국어로 번역하여 중국 각계각층에 보여주었더니 너
무도 기뻐하였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 daum cafe 민족사랑회 .. 선교의장 참조 -
용산에서 봉사자들 및 노숙가족들을 모아서 그 계획을 설명하고 마침내 온
중국을 우리 손에 맡겨주신 하늘에 감사하여 이것을 기도하며 준비하자 해
서 여러 가지 어학훈련과 영적무장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때 맞추
어 용산 역세권이 개발이 된다고 하여 어디론가
가야 될 형편이 되었고 반년여 동안 지방까지 찾아 헤메이다가 조건이 여의
치 않던 중,
이태원의 한 건물 지하를 매입할 계획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 100평에 6억 정도인데 3.5억 정도만 되면 나머지는 융자로 되리라 생각
됩니다.
매입이 안 되면 시 복지과에서 지원조건에서 탈락되며 폐쇄될 수도 있다합
니다.)
2010년이 되면 대부분 기술이 한국과 동등 할 것으로 예측된다 하며 2020
년도에는
중국농촌도 한국형편과 비슷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이 중요한 기회입니
다. 많은 훈련된 자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저 인민들을 내 형제라고 생각하
며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중국이 다시 세계
를 향하여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부자들을 섬기
면 멸시받기가 쉽지만 가난한 자들을 섬기면 존경을 받으며 그들이 다시 다
른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저희들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이것이 저 중국인민
들에게 힘이 되어서 미래에 있을 강대국 간의 갈등이 평화와 협조의 관계로
되게 해 주십시요. 성경은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
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약한 자는 부드러움으로 결국 다스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우리의 약함을 알
고 계십니다.
저희는 그 건물 지하실을 인수하면 바로 서울시민에게 헌납할 것이며 그러
나 계속적으로 세계평화의 일꾼들을 양성해 나갈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입니다.
제 소원중 하나는 제 뼈를 중국 땅에다 묻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박사가 이 땅에 자신을 묻은 것처럼.............................
민족사랑회 유수영목사드림 ( 749-9340, ***-****-****)
E-mail : lanyoo@hanmail.net
백소현사모(***-****-****)


이시대의아픔
유수영
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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