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새롭게하소서 프로그램에 글을 쓰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저의 삶이 평범한 삶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저의 삶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하고 싶을 뿐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 조언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저는 목회자로 13년을 작은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잘 몰라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목차 ***
주제 :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1. 이순신장군은 한번 나는 네번 (어린시절)
2. 첫 번째 수술(초등학교)
3. 눈알을 빼고 싶은 편두통 (중학교, 고등학교)
4.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한 성경 일독 (고등학교)
5. 하나님의 징벌인가? 나에게 닥쳐온 당뇨병. (고등학교 3학년 ~ )
6. 천사를 보내주신 주님. (결혼)
7. 당뇨 합병증과 하나님의 인도. (30대 초)
a. 파도처럼 몰려오는 합병증
b. 하나님의 인도
8. 5년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위로 (30대 후반)
a. 죽음으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
b. 하나님의 위로와 서원기도
9. 새 생명과 하나님의 종이 되다 (40대 초)
a. 신장,췌장을 동시에 이식하다
b. 사역자로 훈련이 시작되다
10. 개척교회와 라마 선교회 (40대 중 - 50대 중)
a. 개척교회를 열어주신 하나님
b. 장기이식 후유증과 전도
c. 교회 이전과 라마선교회
11. 또 다른 시험 암 (50대 후반(현재))
a. 개척교회의 결단
b. 8개월의 고통과 깨달음 그리고 회개
c. 림프암 판정
d. 동시이식 받은 환자가 겪는 항암치료
12. 새로운 나의 모습
*** 내용 ***
주제 :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1형 당뇨, 신장,췌장 동시 이식 그리고 림프암 ...)
서론
“환자분, 보호자 어디있어요? 환자분 암입니다. 통증은 어떠세요?”
2024년 12월 주일 오후에 아산병원 응급실에 입원한 나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아내와 아들이 들어 왔고, 아내 얼굴은 밖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부어 올라 있었다.
마음은 담담하다. “결국 내가 암까지 아파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쉽다. “방금 나는 우리가 왜 주님께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됐는데, 그것을 증거하지 못하고 죽나 보다“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가족이나 형제들은 나를 “종합병원”, “인조인간”이라 부른다. 이제 새로운 고통을 체험할 때가 온 것이다.
1. 이순신장군은 한번 나는 네번 (어린시절)
나의 고향은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이다. 아주 작은 섬은 아니어서 당시에는 중학교까지 있는 섬이다. 우리 집은 마을 전체가 보이는 약간의 언덕위에 있었는데 왼쪽에 초등학교가 있고, 오른쪽에 교회가 있다. 밑에는 선생님들 사택들이 있고, 위에는 교장선생님 사택이 있다. 아버님은 배2척의 선주였고, 그 섬의 조합장도 하셨다.
그런 집에 4째로 태어났다. 개구쟁이였던 나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것 같다.
높은 곳을 올라가기 좋아했던 나는 6살쯤 교회 종탑에서 떨어져 왼쪽이마가 찢어졌다. 어머니가 터진 이마에 된장을 붙이고 나를 안고 보건소로 뛰어가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제는 보건소에서 이마를 꿰매야 하는데 마취제가 없었는지 어른들이 내 손발과 머리를 잡고 그냥 꿰맨다. 옷 꿰매듯이 빨리라도 꿰매면 좋겠는데 한번 꿰매고 뭘하는지 시간을 끈다. 내가 기억하기로 10바늘정도를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3번 더 그런 고통을 받게 된다.
모기장에 미끌어져 상 모서리에 오른쪽 이마 터짐, 아물 때 쯤 작은형이 김일 박치기 흉내 낸다고 박치기해서 다시 터짐, 오징어게임 하다가 밀쳐서 벽 모서리에 부딪혀 머리 왼쪽 터짐. 터질 때마다 머리를 꿰맸다.
초등학교 때 이순신장군의 일대를 수업 듣다가 전투 중 어깨에 총알을 맞아 막걸리 한잔하시면서 총알을 뺐다며 선생님께서 그 고통을 어떻게 참으셨을까 할 때 나는 그 고통 알 것 같았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심한 고통은 잊혀지지 않나 보다,
2. 첫 번째 수술(초등학교)
4살때쯤부터 편도선으로 아팠던 나는 약으로 치료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온갖 민간요법을 사용하였는데 “화장실 똥통에 달걀을 넣었다가 2-3일 후 꺼내어 먹이면 좋다”, “지내를 잡아 볶아서 갈아 목에다가 불어 넣으면 좋다” 등등 여러민간 요법을 사용했으나 아무리 해도 내 목은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로 가서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배를 타고, 비포장고속도로를 지나 광주 병원에 도착하니, 편도선 절제를 해야 하는데 어린아이는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술했다.
깨어보니 천정이 흔들리고, 내 몸이 주체가 안 된다. 침을 삼킬수도 없고, 너무 아파 침을 질질 흘리며 아버님 손에 이끌려 병원에 나오니, 아버님께서 손수건을 하나 주신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르겠는데 물도 먹을 수 없는 나를 앞에 두고 아버님은 비빔밥을 맛있게 드시고 있다. 너무 먹고 싶어서 지금도 나는 비빔밥을 제일 좋아한다.
3. 눈알을 빼고 싶은 편두통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4학년 때 눈병이 심하게 앓고 시력이 -7까지 떨어졌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졸업식때 안경을 사주셨는데 중학생일 때 알 수 없는 편두통이 왔다. 처음에는 ‘사리돈’이라는 약을 절반 먹으면 좋아졌는데, 이 편두통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항상 머리는 종을 치듯이 딩딩 거렸고, ‘사리돈’ 약은 3알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진통제 약은 뭐든지 사서 먹었다, 결국 한양대병원에서 MRI를 찍게 되었지만 , 결과는 정상이다. 머리 뒤쪽은 맥박 뛰 듯이 고통스러웠고, 눈 쪽은 눈알을 빼버리면 이 고통이 없어지나 할 정도였다. 그 고통은 고등학교 1학년 까지였다. 그 후 이유없이 고통이 사라졌다.
4.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한 성경 일독 (고등학교)
고등학교는 미션스쿨로 입학했다. 물론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다. 수업 중 가장 싫은 것은 수요일에 드리는 예배이다. 선생님들은 몽둥이를 들고 예배시간에 졸고 있는 학우들의 머리통을 때린다. 나도 한 대 맞아보니 머리가 뽀개지는 것 같다. 그래서 반항심이 생겼다. 예수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에 우연히 습득한 예수님 부정하는 책을 읽어 보았다. 재미있다.
관련된 책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많이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과 예수는 허구였다는 것을!’.
이제 이 허구를 믿고 있는 내 가장 친구를 구원해야 한다. 교회 학생부 회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리 논쟁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란다. 말이 안 통하는 친구이다.
그렇다면 그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 “[마 22장] 7형제와 결혼한 여인”. 윤리적으로 맞지 않다.
친구가 대답하지 못한다. 1차전 승리,
친구가 자기 교회 전도사님을 소개한다. 똑 같이 물어봤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한다. 2차전 승리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역시 하나님과 성경은 허구이다.
5. 하나님의 징벌인가? 나에게 닥쳐온 당뇨병. (고등학교 3학년 ~ )
나는 고등학교3학년 때 매우 건강한 학생이였다. 그 때가 내 인생의 최고의 건강 상태였을 것이다. 키 181cm, 몸무게 82kg, 큰형님 쫓아 복싱도 약간 배웠고, 농구, 축구 등을 즐겨하며 학생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학력고사가 끝나고 당뇨병에 걸렸다. 1형 당뇨이다. 아침,저녁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단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위로 한답시고, ‘외국에 어느 테니스 선수는 몸 관리를 잘 해서 53살까지 살았단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절망이였다. 꿈꿔왔던 인생이 시작도하기 전에 무너져 버렸다.
처음에는 ‘배가 체하여 이럴 것’이라며 밤새 주물렸다. 배가 피멍이 들었다.
대학생활은 학생시위에 빠져 있었다. 술도 배웠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마음껏 살아보고 싶었다.
사회생활은 컴퓨터 학원 강사로 시작했다. 후에는 강남에서 문화센타 컴퓨터 강사생활을 했다. 당시 일주일에 3일동안 4교시 수업해도 웬만한 월급쟁이 보다 1.5배는 더 벌었기에 저녁마다 친구들과 술 마셨다.
27살 때 1년가량 일본 연수를 갔다 온 나는 귀금속 회사(혼쥬얼리, 미니골드)에 전산과장으로 취업했다. 회사 전체 컴퓨터 관리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란다.
회사가 신림동에 있기에 일이 끝나면 신림동 유흥가로 달려갔다. 20대의 방탕의 삶은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6. 천사를 보내주신 주님. (결혼)
당시 회사의 경리 일을 하고 있는 아내는 24살이였다. 1년 가량 사귀다가 결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내가 당뇨병이 있고, 매일 주사 맞으며 산다고 말했다.
그런데 괜찮단다. 단지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한다.
후에 아내는 ‘당뇨병이 이렇게 무서운 병인 줄 몰랐다’라고 고백했었다.
그래서 장모님을 만났는데, 첫 번째 질문이 ‘교회 다니고 있냐?’였다.
당시 세상에서는 결혼 1순위가 ‘컴퓨터프로그래머’ 일정도로 인기있는 직업이고, 나는 그 중에서도 혼자서 회사 관리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유능한 직업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4째 사위(아내도 4째 딸임)는 교회 다니는 사위를 얻고 싶어 했다는 말을 내 앞에서 하시다니... 자존심이 상한다. “당뇨병만 아니면 나 같은 사위 정도는 감지덕지 일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장모님은 상견례에서도 사위의 불신앙을 어머님께 말씀하셨다.
그 후로 결혼 전날까지 처가와 싸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결국 결혼의 조건으로 주일 예배 드리는 것으로 아내와 합의를 봤다.
결혼 후 아내는 저혈당으로 쓰러진 내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아내는 일에 지쳐 쓰러져 자는 나를 위해 밤새 잠을 못자고 옆에서 뜬눈으로 지켜보며, 혈당 재기를 10여년간 했다. 아내는 병원을 싫어한다. 그런데 남편이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어쩔 수 없이 병간호를 해야 한다. 이제까지 많은 병원생활 중에 한번도 내색하지 않고, 남편이 병원에서 금식하면 같이 금식한다. 나와 두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내는 분명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 이다.
7. 당뇨 합병증과 하나님의 인도. (30대 초)
a. 파도처럼 몰려오는 합병증
아내가 결혼 후 바로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급하다.
앞으로 살아봐야 20년 밖에 없는데 돈을 많이 벌어놔야 한다는 생각에 큰형님이 사업하는 가구 일을 배워 나도 사업을 하고 싶었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 늦게 퇴근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밤새 술 마셨고. 주일 예배시간은 잠자는 시간이다.
아내는 나에게 예배시간에 찬양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유는 입 벌리면 술 냄새가 너무 난다는 이유다. 지금 생각해도 내 주변에 함께했던 성도님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결혼 4년째 당뇨 합병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몸이 붇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장이 나빠졌다.
고혈압이 왔고, 한쪽 눈의 망막 혈관이 터져 실명위기까지 왔다.(망막수술)
언제부터인가 발의 감각이 없어져 간다. 그리고 인슐린 주사로 혈당관리가 안 된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저혈당으로 쓰러졌다. 길에서, 집에서, 승용차안에서....
저혈당보다 더 힘든 것은 고혈당이다. 하루에도 몇 번 혈당수치가 500을 넘어 'HI'가 찍히는 것이 다반수다.
b. 하나님의 인도
나는 여전히 술을 마셨고, 여전히 예배시간에 잠을 잤다. 벌써 5년째이다.
그러던 어느 주일 잠만 자던 나에게 환상이 보였다. 너무 선명한 환상이였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요 5장] 베네스다 호수의 환상과 비슷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환상이 믿어졌고, 해석까지 됐다는 것이다.
“사람들(의사)의 도움으로 내가 치유받는”다는 해석이다.
당시 췌장이식으로 유명한 외과 한덕종교수가 있던 아산병원으로 갔다.
한덕종교수는 어짜피 신장도 많이 나빠졌으니 췌장과 신장을 동시에 이식하자고 제안하셨다. 문제는 당시 동시이식은 일년에 1~2번 하는 수술로 국내에서는 100여건밖에 해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공률도 낮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치유 될 거란 확신이 든다. 그리고 장기이식을 신청했다.
8. 5년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위로 (30대 후반)
a. 죽음으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
몸은 점점 합병증으로 지쳐간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그림자!
아내와 핏덩이 같은 두 자녀가 눈에 밟힌다.
사업을 시작했다. 남은 시간 돈 벌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제는 거래처 사장님들과도 술을 마신다. 회사는 번창하여 벤처기업까지 성장했다.
아내는 제발 술 마시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나는 길을 걷다가 습관이 생겼다. 인도와 차도 경계선을 항상 걷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자살은 할 수 없으니 제발 지나가는 차가 나를 치어 죽게 해 달라고”
의사는 이제 투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싫다. “하나님께서 나를 반드시 치유하실거란 확신이 든다” 그러나 현실은 투석하며 보낼 시간이 없다.
이제는 저혈당이 아님에도 깜박깜박 정신을 잃는다. 운전하다가도 중앙차선을 넘고, 앞차를 박을 때도 여러 번이다.
고통의 삶은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두 자녀도 내 마음의 짐에서 내려놓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내가 내려놓게 되고, 나중에는 자녀들도 내려놓게 되었다. 그져 ‘고통없게 죽고 싶을 뿐이였다’
이제 죽음으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는 종착역에 다다른 것 같았다.
b. 하나님의 위로와 서원기도
언제부터인가 목사님 설교가 들린다. 그리고 그 설교가 재미있다. 그냥 재미있다.
토요일에 술을 끊고, 주일에는 맑은 정신으로 설교를 들었다.
어느 날 아내가 금요철야기도를 가자는 것이다.
금요철야기도의 좋은 점은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단점은 기도가 너무 길다. 20분 기도이다. 그것도 통성으로 ....
나는 기도시간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개숙인 내 위로 거친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후에 눈을 뜨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기도하는 성도들밖에 없다.
몇 주 후 다시 기도시간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데 또 다시 거친 숨소리가 위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또 다시 몇 주후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 십자가 밑에 있다는 것을, 그 거친 숨소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숨소리라는 것을.
그런데 나는 그 거친 숨소리가 싫다. 나를 짓누르는 듯한 숨소리, 나만큼이나 힘들어하는 숨소리... 나는 그 거친 숨소리가 싫다.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다.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까 생각했다. 보통 환상등을 체험하는 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성경도 찾지 못하는 날라리 성도이다. 통성 기도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지.
몇 번의 체험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그 거친 숨소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목 놓아 외쳤다.
“누가 나 때문에 고통 받으라고 했습니까? 나 같은 놈이 무엇이간데 그렇게 고통받고 있습니까?”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십자가에 흐르는 피가 무릎 꿇고 있는 나의 두 다리 사이로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위를 처다 보았다. 피와 땀이 섞여 멀건 핏물이 예수님의 콧등에서 떨어져 내 이마에 떨어진다.
정신이 든다. 지금도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 중이다.
나는 눈물로 주님께 서원 기도를 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신다면 남은 생명, 주님이 나를 살려주심을 증거하며 살겠습니다”
2년이 흐른 후 어느 여름 날 주일 새벽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산병원 장기 이식센타란다.
9. 새 생명과 하나님의 종이 되다 (40대 초)
a. 신장,췌장을 동시에 이식하다
아내와 나는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아산병원으로 갔다. 피를 뽑고 다시 집으로 가서 대기해야 한다. 앞선 대기 순서가 이식이 되면 또 다시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한지 4번째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으려 할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입원수속 받으란다. 주일 새벽 6시쯤이다.
다시 아산병원으로 간 나는 병원 문을 들어설 때 나도 모르게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을 읊조리고 있다.
문제가 생겼다. 피검사 결과 중 포타슘 수치가 너무 높아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덕종 교수님이 학술회의로 해외 출장 중이란다.
후에 알게 됐지만 한덕종 교수님은 담당 의사에게 급히 귀국 할 테니 밤12시까지 무조건 포타슘 수치 정상으로 내려놓으라고 하셨단다.
포타슘 수치를 급히 내리는 방법은 관장이다. 아침부터 시작한 관장은 저녁까지 했다.
관장하고 피검사, 관장하고 피검사....그리고 밤 10시쯤 피검사에 포타슘 수치가 정상으로 내려왔단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환호를 했다.
자정부터 9시간 30분간의 수술, 그리고 다시 새 생명을 얻었다.
당뇨가 없어지고, 신장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고혈압도 없어졌다.
인슐린주사를 맞지 않아도 된다. 당시 내 나이 만38세.
환상으로 보여준 [요 5장]의 말씀이 이뤄진 것이다.
b. 사역자로 훈련이 시작되다
수술 후 사업을 접고 1년 후 신학교를 들어갔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안양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무임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전도사 사역 몇 달 안 되서 젊은 청년이 자살을 했다. 그 청년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매주 예배 때 휴대폰을 보고 있어서 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주님께 또 원망의 기도를 했다. “이것을 보여 주실려고 저를 사역자로 인도하셨습니까? 차라리 병든 나를 데려가지 저 젊은 청년을 데려가십니까?” 하염없는 눈물로 주님께 하소연 했다.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질문을 한다.
“사역자란 무엇인가? 예배로, 기도로, 찬양으로 저 영혼들을 변화, 성장성숙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것은 무책임하게 책임 전가 하는 행위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신학 외에도 약5년간의 영성훈련을 배웠고, 주석 책들을 읽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가족, 형제, 처가 모두 반대했다. ‘살려놨더니 힘든 목회자 길을 간다’는 이유다. 목사임직 때 동기 목사들은 가족들이 와서 축하를 해 주었지만, 혼자 있는 나는 조금 창피했다. 주섬주섬 성의를 벗어 정리하고, 속히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늦게 아내가 꽃다발을 들고 왔다. 역시 내 편이다.
10. 개척교회와 라마 선교회 (40대 중 - 50대 중)
a. 개척교회를 열어주신 하나님
아내는 조그만 아파트를 내 수술비로 이미 팔았고, 작은 월세 보증금만 남았다.
당시에는 장기이식을 할려면 먼저 선입으로 3,000만원을 병원에 선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은 돈 3,000만원으로 월세 보증금을 마련한 것이다. 개척을 해야 하는데 월세보증금을 또 쪼갤 수밖에 없다.
아내는 3,000만원 중 1,000만원을 교회보증금으로 사용해도 좋다고 한다. 문제는 집 주인이 난색을 표한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결정했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갑자기 보증금을 주겠다고 한다. 심지어 월세를 올려 받지도 않겠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1년만 더 살아주면 이사할 때 이사비용도 주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재건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란다.
구로에 교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전 목사님이 성물을 전부 가져가서 아무것도 없다. 아내와 두 자녀를 돗자리에 앉혀놓고 첫 예배를 드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중에 돈은 약 200만원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족함 없이 모든 성물을 마련하는데 한달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 까마귀를 붙여 주신 것처럼 사람들을 보내어 성물을 채워주신 것이다.
b. 장기이식 후유증과 전도
개척교회는 나에게 또 다른 문제에 부딪쳤다. 물질, 시간, 교회의 문제가 아니다.
처음에는 장기이식의 후유증으로 수시로 열이 났다. 아산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6년간을 고생했다. 장기를 한 개 이식한 것과 두 개를 동시에 이식한 것은 차이가 크다. 처음 동시이식 모임에 갔을 때 간호사가 웃으면서 “죽을만큼 고생하다가 이식을 받아야 견디는데...” 하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게 됐다.
동시 이식환자가 동일한 후유증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 나는 열로 왔다. 매일 수시로 열이 났고, 해열제를 계속 먹을 수밖에 없는데, 열이 내리면서 식은땀이 비오듯이 나와 하루에도 옷을 몇 번 갈아입어야 했다.
일주일에 평일은 전도지로, 토요일은 붕어빵전도를 하면서 양손에 방아쇠수지가 걸리고, 백일해, 폐렴등으로 아산병원 응급실을 제집 드나들듯 다녔다.
c. 교회 이전과 라마선교회
구로에서 3년 목회를 하다가 인천으로 교회를 이전했다. 목회를 하면서 나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과연 개척교회 목사들은 대형교회 집사들보다 기도를 많이 하는가?”
“그 기도가 돈 달라는 기도, 성도 보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기도를 하는가?”
결론은 “아니다”였다.
가까운 동기목사들을 모았다. “목사가 먼저 영이 살아야 한다” 특히 “개척교회가 살아야 한국 교회가 산다”는 표어로 동기목사들을 모았다. 90명이 넘는 동기 중에 7명이 모였다. 한 달에 하루 회원 교회를 돌아가면 일일 부흥집회를 시작했다.
30분 찬양, 1시간 설교, 1시간 통성기도. 오후 저녁으로 집회를 열었다.
“노래하지 말고 찬양해라”, “설교시간에 말씀 외 다른 말 섞지 말라”, “기도는 1시간 간절하게 통성으로 해라”
선교회와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끔 서원기도가 생각이 난다. 사람들에게 나를 치유하시고, 새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했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장기 동시이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히 신장이식정도로만 생각한다. 이해가 간다. 동네 의사들도 잘 이해를 못한다.
심지어 진료 거부하는 의사도 있다.
하나님께 핑계 거리가 생겼다. 교만함도 생겼다.
평생을 아파보니 이제는 아픈사람의 말만 들어도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 알겠다.
그런데 말해주고 싶지 않다. 위로해 주고 싶지도 않다. 물론 내 안에 질병의 트라우마가 있기는 하다.
언제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앞에 손 잘린 사람보다 내 손톱밑에 가시가 더 아픈거아”라고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이 고통받는 것은 손톱밑에 가시정도 고통이니 내 앞에서는 아프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이였다. 교만의 극치이다.
11. 또 다른 시험 암 (50대 후반(현재))
a. 개척교회의 결단
코로나를 거치면서 선교회는 내분으로 약해지고, 교회는 남은 몇몇 성도들마져 떠났다.
무엇이 문제인가?
선교회를 이끄는 회장의 문제이고, 성도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도 담임목사의 문제이다. 그렇다 나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목회자들에게 싱싱한 말씀의 재료를 주셨다.
그 말씀의 재료를 맛있게 성도들에게 먹여야 하는데, 나는 여러 음식은 만들 줄은 알겠는데 맛이 없다. 2024년 하나님은 나에게 [롬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의(믿음)에 대한 말씀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2024년 4월 그동안 섬기던 교회를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다시 목회공부를 배워보고 싶었다. 선교회 회장도 내려놓고 싶었지만 남은 회원들이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계속 유지하고 있다. 주님은 나를 안양으로 인도하셨고 한 원로 목사님께서 자신의 교회에서 주일 오전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하신다.
b. 8개월의 고통과 깨달음 그리고 회개
5월부터 아파왔던 복통은 12월이 됐을 때 극심한 고통으로 내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변비인가 했다. 18년가량을 면역억제제를 먹고 있기 때문에 변비로 고생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내병원에서는 배에 가스가 차서 소화가 안되는 것이라고 소화제를 처방해 주셨다. 점점 복통은 심해지고 잦아졌고, 동내 병원은 여전히 소화제만 주신다. 10월부터는 복통으로 잠을 자기가 어렵다. 11월에 아산병원에서 CT를 찍었다. 그런데 담당의사가 학술회의로 1달 후에나 결과를 볼 수 있단다.
11월 중순쯤부터는 복통으로 하루에 한끼도 밥을 먹기가 어렵다.
그런데 정신이 맑다. 심지어 1년가량 머리에서 맴돌던 [롬 4장]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조금씩 깨달아 진다.
12월 첫째 주일 잠을 못잔지 4일째다. 밥을 못 먹은지도 3일째다. 복통은 10분단위로 심하게 1분정도 온다. 그래도 주일 예배는 드려야 했기에 성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앉아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리고 오후 늦게 아산병원 응급실로 갔다.
CT를 찍고, 진통제를 링거로 맞았지만 복통은 여전하다. 더 강한 진통제를 맞아도 여전하다. 산모의 해산의 고통이 이정도일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5분단위로 복통이 온다. 의사는 아내를 별도로 부른다. 아내가 떠나고, 더 이상은 복통을 참기가 어렵다.
갑자기 [롬 4장]이 깨달아졌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믿음)으로 여긴 것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19절],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20절], 이루실 줄 확신[21절]해야 의인[22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는 자는 약하여지지도 의심하지도 않기 때문에 믿음의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이다”라고 깨달아 졌다. 그리고 바로 환상이 보였다.
[출애굽]에서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이였다.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하면 홍해가 갈라질 것이고 우리는 그곳을 건너면 된다”라는 생각을 하며 “언제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나”하며 생각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손들고 기도하면 되잖아”
그 음성은 나를 보게 하였다 “그렇구나 내가 만약 모세의 기도로 홍해가 갈라진다는 지식이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손들고 기도 했을거다” 정신이 든다. 여전히 응급실이다. 그런데 눈물이 난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 이 지식이 하나님을 형상화 시켰구나, 내가 실행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구나 ” 회개의 눈물이 난다.
마침 의사가 와서 ‘환자분 암입니다’라고 말을 한다.
담담하고, 안타깝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알겠는데, 내가 깨달은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암이라니 참....
c. 림프암 판정
다음 날 20년전 서원기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서원 기도를 갚으라 했는데 이리 뺀질 저리 뺀질 하다가 결국 암까지 결렸구나...”하며 다시 회복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증거하며 살아야 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장기이식 담당 의사가 와서 ‘목숨이 우선이니까 항암 치료 중 이식받은 두 장기가 손실 될 거라’고 말한다. 18년을 면역억제제를 먹어 면역력을 떨어뜨렸는데, 이제는 항암치료를 위해 인위적으로 면역력을 높여야 한단다.
항암 치료를 하면 암은 치료가 되겠지만 다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고,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 상관없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질병으로 고통 없이 살아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런 몸 상태로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을까?
“하나님 두 장기를 최소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살려주세요” 기도를 하게 된다.
d. 동시이식 받은 환자가 겪는 항암치료
2024년 12월 17일 1차 항암치료가 시작했다.
정상인들도 암 판정 받고 항암치료하면 힘들다는데, 동시 이식한 내가 항암치료하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항암 부작용으로 14가지 겪어 봤다.
1. 불면증
2. 설사
3. 기립형 저혈압(이지러움)
4. 면역저하
5. 구토 증세(메스꺼움)
6. 전신 통증(몸살)
7. 숨참(그냥있어도 숨참)
8. 급격한 무기력
9. 손.발끝 저림
10. 손.발.얼굴 까매짐
11. 음식 맛 잃음 (맵고, 짜고 등 완전히 잃음)
12. 발.얼굴 등 부음
13. 탈모
14. 가려움
당뇨병 이후 나의 장기중에 ‘위(소화기)’가 가장약한 부위였다. 저혈당으로 쓰러져서 깨어나면 하루정도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사단은 인간의 가장 약한 곳을 공략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위’ 인 것 같다.
30대 중반 쯤 주일 예배를 드리려 교회를 가려고만 하면 길에서 구토하기 시작했다. 주 중에는 괜찮다가도 주일 교회만 가려고 집을 나서면 길에서 구토를 했다. 어느 주일에는 토요일 저녁부터 굶어 보기도 했으나 그래도 교회만 가려 하면 구토했다.
심지어 ‘뇌’의 문제일까 하고 MRI를 촬영해봐도 멀쩡하다.
구토하면 가족들은 교회로 보내고, 나만 다시 집으로 되돌아 왔는데, 어느 주일 맘속에 결단이 필요한 것 같아 구토하면서 교회를 갔다. 놀랍게도 그 후 주일 구토는 멈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신체중에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여전히 ‘위’였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나를 강하게’하신다고 하셨듯이 ‘위’로 고생했던 내가 항암치료 중에는 ‘위’가 가장 강했다. 항암 초기에는 하루에 6끼니를 먹었고, 항암 말미에는 하루에 4~5끼니를 먹었다.
항암부작용으로 14가지 외에도 장기이식으로 여러 가지 고생을 했지만 이를 이길수 있게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나는 항암 부작용이 적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보다 이제까지 어떠한 고통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게 힘을 주신 하나님게 더욱 감사할 뿐이다.
올 해 4월 마지막 항암 6차가 끝났다. 항암 맞을 때마다 손실 될 것 같은 장기는 10일이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 장기이식 교수님도 신기해 한다.
12. 새로운 나의 모습
지난해 복통으로 고통을 심하게 받을 때 기도 가운데 “너를 살리신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하고 실천하지 않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알고 있다. 내가 병든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은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병든자들이 싫었고, 병든자들이 치유받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싫었다.
이제 나는 20년 전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시작하려 한다.
질병으로 아픈 이들을 찾아 위로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려 한다.
아니 증거한다기 보다는 ‘저런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 라며 아픈이들에게 내모습 자체가 위로가 되기를 원하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사명이기를 기도한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주만나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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