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복음으로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사연을 올립니다.
60년 세월을 하나의 글로 담았기 때문에 조금 길 수도 있지만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짧게 보신다고 생각하시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네킹 신부》
1장. 쇼윈도 안의 신부
우윳빛 네온이 유리 안에 빛나면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미소가, 미소가 하나 가득
그 누구의 손을 잡고 웨딩마치 울릴까……
아, 아, 그대 아름다운 여인, 마네킹 신부.
나도 노랫말 속 마네킹 신부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신부가 되고 싶었다.
1992년 어느 날이었을까.
버스를 타고 이대 앞을 지나가는데 쇼윈도 안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네킹 신부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눈부시던지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우와! 예쁘다. 나도 저런 드레스를 한번 입어 볼 수 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쇼윈도 안의 마네킹 신부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다.
그저 예쁜 드레스를 입고 환한 불빛 아래 서 있었다.
나는 그때 뇌전증도 있었고, 배움도 짧았다.
엄마도 많이 편찮으셨고, 오빠도 없었다.
막내딸인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쇼윈도의 불빛이 언젠가 내 인생 이야기의 첫 장면이 될 줄은.
나는 마네킹처럼 예쁜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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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사진 속의 남자
어느 날 언니가 내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집을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그 사진이 자꾸 생각났다.
결국 다시 집에 들어가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아까 그 사진 다시 보여줘.”
사진 속에는 화분 하나가 있었고, 그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화분에 심긴 식물이 군자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남자를 보고 말했다.
“누구야? 잘생겼네.”
언니가 말했다.
“그 사람 청각장애인이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청각장애? 그래도 말은 하겠네?”
언니가 말했다.
“못 들으면 말하기도 어렵지.”
그리고 아직 벌어 놓은 돈도 없다고 했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이 내 남편이 될 줄 몰랐다.
장애가 있다는 것도,
돈이 없다는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사진 속 남자가 잘생겨 보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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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만두 한 접시와 육교
가게에 도착한 나는 그 사람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과일과 주스를 대접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를 처음 보았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준수한 외모.
그런데 부끄러움이 많은지 권사님 옆에 앉아 내 시선을 피하는 듯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새색시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권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 사람이 점점 답답하게 느껴졌다.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내 말 듣는겨? 씹는겨?’
그러다 순간 생각났다.
‘아참! 이 사람 청각장애인이었지.’
나는 잠깐 멋쩍어졌다.
그리고 권사님에게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권사님이 말씀하셨다.
“그냥 가면 예의가 아니지.”
그러더니 그에게 나를 데리고 나가 맛있는 것을 사주라고 하시며, 우리를 거의 쫓아내듯 대문 밖으로 밀어내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밖에 서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
그가 먼저 움직였다.
나는 주인 따라가는 강아지처럼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작은 분식집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김밥.
나는 만두.
그런데 나는 만두 하나를 먹고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는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내게 만두를 먹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다.
그때까지 그와 나 사이에는 단 한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슬쩍 배를 만졌다.
그런데 글쎄.
그가 내가 시킨 만두를 자기 앞으로 가져가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 남자 돼지 아냐?’
기가 막혔다.
‘내가 시킨 만두를 안 먹는다고 지가 먹어?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슬슬 성질이 올라왔다.
그런데 음식값을 계산할 때 그의 지갑을 슬쩍 보게 되었다.
지폐가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에게? 돈도 많으면서 겨우 분식을? 쫌생이.’
밖으로 나온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그도 어색하고 나도 어색했다.
더구나 말 한마디가 없으니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육교가 보였다.
나는 순간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다.
육교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저, 저는 여기서 육교를 건너 반대편에서 차를 타야 집에 가는데…”
손짓과 발짓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육교 계단을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갑자기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멀리 육교 밑에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저 남자 왜 저러고 있는겨?”
의아했다.
혹시 아까 분식집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건가 싶었다.
나는 급히 육교를 내려갔다.
내 지갑을 보여주며 그의 지갑도 확인했다.
다행히 지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육교로 올라가려는데 그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집을 못 찾아가나? 날이 저물어 가는데…’
나는 결국 다시 돌아갔다.
그를 육교 밑에 두고 나 혼자 올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그냥 어리석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 사람을 두고 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내 뒤통수를 친 것이 혹시 하나님의 손은 아니었을까.
당시 나는 너무 답답했다.
빨리 육교를 건너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다가갔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고마워요. 만두도 사주고.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손짓으로 설명하며 그를 살짝 돌려세웠다.
그가 움직였다.
나는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계단을 거의 날아오르듯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맛있어. 니가 다 먹었다. 퉤! 퉤! 버스만 놓쳤네.”
그때는 몰랐다.
육교 아래에 서 있던 그 남자가 내 인생의 남자가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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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마네킹 신부가 되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말했다.
“엄마! 나 오늘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글쎄…”
그런데 언니가 말했다.
“이건 뭔 소리야? 그런데 또 만난다며? 니가 또 만나자고 했다던데. 방금 권사님한테 전화 받았어.”
“뭐? 내가 언제?”
그제야 나는 육교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언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웃었다.
“니가 만나자 했네, 야 지집애야! 너 그 사람 청각장애인인 거 몰랐냐? 그런데 웃어? 그 사람이 나이가 몇인데 집을 못 찾을까 봐 걱정했냐? 아주 쇼를 했네. 안 봐도 뻔해. 그림이 그려진다. 잘난 척 잘하는 막내, 이참에 인어공주 되실 맘이신가 봐.”
그 뒤 나는 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그와 나의 형편과 사정을 생각했다.
그 만남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아니,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해,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1993년.
그와 함께 신혼여행을 갔다.
주위 사람들은 우리 둘이 너무 닮았다며 잘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말과 달리 우리의 신혼생활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마디의 대화도 없었으니.
그때 나는 새 신부로서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신랑이 직장에 가든 말든 늦잠을 잤다.
밤에는 신랑이 오기 전에 잠들었다.
방은 한 칸뿐이고,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 나오는 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랑이 있건 없건
“부앙! 붕붕!”
방귀도 뀌었다.
그런데도 신랑은 나의 그런 행동에 전혀 불만이나 불평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예뻐 보이는지,
밤늦게 들어와 퍼져 자는 내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침을 차려주지 않으면 자기가 알아서 차려 먹었다.
없으면 굶고 갔다.
나는 그런 신랑의 성격이 조금 못마땅했다.
엄마에게 쪼르르 가서 신랑의 속 터지는 성격을 쫑알쫑알 일러바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친정에 가면 언니가 물었다.
“어이, 새댁. 웬일이야? 요사이 뭔 문제 있어?”
그러면 나는,
“무슨 문제? 아주 편해 죽겠어. 잠만 자. 그 사람 잘생긴 데다 왜 그렇게 착한지…”
쓸데없는 소리,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고 돌아왔다.
답답하고 억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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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첫딸을 보내고
그렇게 신랑이 다니던 반점을 오가며 살았다.
어느 날 나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딸이었다.
첫딸을 얻고 보니 아기가 너무 예뻤다.
하지만 당시 나는 육아 상식도 부족했다.
언니가 자주 와서 아이를 봐주었다.
나는 아기를 안고 반점을 이틀에 한 번꼴로 드나들었다.
아기가 생기니 생활비도 점점 빠듯해졌다.
친정에서 많이 보태주셨다.
시댁에서는 거의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첫딸을 너무나 쉽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그 슬픔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책임을 신랑에게 돌리고 싶었다.
신랑이 미웠다.
모든 것이 미웠다.
언니는 화가 나서 반점까지 찾아갔다.
아이들을 잘 보살펴 준다더니 이게 뭐냐며 대판 싸웠다.
결국 신랑은 반점을 그만두었다.
그 뒤 여기저기 직장을 구하려 애썼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신랑을 쉽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누구든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갈 수 있고,
그 누구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 아니던가.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약자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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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헤어지려고 했는데
첫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서 나는 신랑과 헤어질 결심까지 했다.
신랑은 글씨를 써서 서로 대화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신랑이 쓴 글에는 맞춤법이 틀린 부분이 많아 오해가 생겼다.
신랑은 글을 쓰려 하지도 않고,
읽으려 하지도 않고,
수어도 배우려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답답해졌다.
한강에 가서 아기의 영혼을 띄워 보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헤어지려고 마음먹은 그때,
또 아이가 생겼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부랴부랴 언니는 큰형부에게 부탁했고, 사돈이 경영하는 인천의 주물공장에 겨우 신랑의 일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만삭이 되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언니가 내게 말했다.
“너 이번에 아기 낳으면 다신 놓치지 마. 아니, 아예 수술하고 퇴원해.”
나는 깜짝 놀랐다.
“언니! 지금 무슨 말이야? 수술이라니? 아기 둘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언니가 말했다.
“야, 애는 낳는다고 다 부모냐. 너를 생각해서가 아니고 이서방도 생각해야지. 니가 생활비 벌 거야? 시댁에서 도움이라도 주든? 잘 생각해.”
언니가 돌아간 뒤 나는 병실에서 한참 생각했다.
결국 울었다.
다음 날 언니가 아기를 데리고 왔다.
남자아이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퇴원할 때 수술할게.”
남편에게는 장애가 있었지만,
우리가 아직 신혼부부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날 목사님이 병원을 방문해 주셨다.
아기 이름도 지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심란하기만 했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잠만 잤다.
그리고 퇴원하기 전에 수술을 했다.
언니는 퇴원하는 날 다시 와서 말했다.
“이 아기는 니가 몸 추스르고 건강해질 때까지 내가 키워줄게. 이것아. 아기 낳았다고 엄마가 다 되는 건 아냐.”
그렇게 신랑의 직장 때문에 나는 언니가 마련해 준 인천 남동공단 옆의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아기와 떨어져서.
언니는 1년 동안 밤낮이 바뀐 아기를 돌보느라 고생하면서도 책임지고 길러주었다.
내 형편을 아는 언니는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언니.
그때 나를 놀리던 언니가 눈물 나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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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인천에서
인천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나는 몸과 마음이 아팠다.
매일 일찍 출근하는 신랑은 퇴근해서도 지친 몸을 이끌고 내게 먹을 것을 해주었다. 그런 신랑이 옆에 있는데도 나는 혼자 멀리 버려진 것만 같았다.
먼저 내 곁을 떠난 첫딸 생각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신랑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을 쌓고 있었다.
신랑은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어쩌다 한 번 쉬는 날이면 서울 친정집에 아기를 보러 혼자 다녀왔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나와 떨어져 있는 아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슬프다는 이유로.
지금 생각해도 나는 자격 미달이었다.
이기적인 면이 많았다.
그렇게 나는 신랑에게 토라진 듯 뾰로통한 채로 지냈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신랑과 나 사이에 별다른 대화도 없이 1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듬해 봄,
언니가 아기를 데리고 왔다.
언니는 들어오자마자 한바탕 쏟아냈다.
“아이고! 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이제 니 애 니가 길러. 애가 왜 밤낮이 바뀌어가지고 낮에 자고 밤에 울어대니!”
그리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에미가 돼가지고 죽상을 하고 뭐야?”
“내가 뭘…”
“야! 곧 죽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네. 요런 싸가지 없는 건 여전하셔요!”
그러더니 신랑 이야기를 꺼냈다.
“이서방은 어떻게 지내?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전에 왔을 때 보니까 많이 말랐더라. 피곤해 보였어. 넌 뭐하냐? 집에서 마누라가 신랑도 안 챙기고.”
내가 말했다.
“몰라. 알아서 먹고 다니겠지.”
언니가 펄쩍 뛰었다.
“어라! 요년 말하는 것 보게!”
그러면서 보약을 내밀었다.
“이건 보약인데 엄마가 이서방 먹이라고 지어주셨어. 퇴근하고 오면 신경 써서 먹게 해줘. 너만 잘 먹을 생각하지 말고 이서방이 있어야 너도 있고 애도 있는 거야. 알았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 이서방 장애인이라고 우습게 보거나 만만하게 생각하지 마. 그 사람 너같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하고 차원이 달라.”
나는 언니가 가고 난 뒤 괜히 큰소리쳤다.
“안 와도 된다! 안 기다린다! 흥!”
그런데 이상했다.
언니가 다녀간 뒤부터 나는 신랑과 나 사이에 쌓아 놓았던 보이지 않는 담을 조금씩 허물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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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사람
시간이 가고 아이는 자랐다.
아이는 신랑을 닮고 나를 닮아 무척 예쁘고 귀여웠다.
남자아이라 그런지 잘생겼다.
신랑은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제시간이면 어김없이 집에 들어왔다.
나는 그 성실함과 책임감을 보며 조금씩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막함은 여전했다.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의 나는 마치 광야에 홀로 선 신부 같지 않았을까.
그가 힘들여 벌어온 돈을 들고 몰래 도망가버릴까 하는 못된 생각까지 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나를 믿었다.
내 옆에 묵묵히,
조용히,
함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때부터 신랑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팔자타령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그는 내가 소중했는지, 이뻐 보였는지 어디서나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아프면 자기도 함께 아픈 사람처럼 힘들어했다.
그의 마음과 노력이 내 마음을 움직이려 할 때,
또 하나의 일이 터졌다.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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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사장은 돈을 갚아야 할 상황이 되자 도망갔다.
그런데 신랑은 어렵게 그 사장을 다시 만났다. 예전에 일한 돈도 받지 못한 채, 사장이 새로 세웠다는 회사에서 또 일하게 되었다.
나는 그 사람이 사돈이라는 이유로 믿었다.
그런데 돈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게 되었다.
신랑은 자신이 일한 시간을 꼬박꼬박 적었다.
월급이 적다고 늘 불만이었다.
나는 그냥 신랑의 계산이 틀린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노발대발하며 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언니의 행동은 신랑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부담을 주고 눈치를 보게 만들기도 했다.
그 뒤에도 신랑은 힘들게 일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신랑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철없던 나는 싸늘하고 냉정한 세상을 바라봤을 뿐인데,
세상은 정말 목마른 사막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사막 같은 세상에서 신랑은 내게 오아시스였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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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두 아이와 작은 행복
어느 날 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말했다.
“막내야. 내가 그동안 너 이름으로 청약저축을 들고 있었는데 당첨됐다. 아파트 21평이야.”
나는 놀랐다.
언니는 위치가 멀지만 전철이 있으니 신랑 회사 다니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다른 제안을 했다.
“니가 지금 그 집에 들어가 사는 것보다 우리 막내가 이사하려고 하니 그 집을 빌려주고 니는 그 옆에 작은 아파트 전세로 들어가는 건 어때? 니 아들이랑 우리 아들이랑 형제처럼 지내고, 내가 가까이서 돌봐줄게.”
우리 집은 딸만 넷이었다.
오빠는 없었다.
나와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그때 나를 도와준 언니들이 있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막내언니 옆으로 이사했다.
내 아들이 언니 아들보다 두 살 많았다.
아이들은 서로 형, 동생 하며 정말 친형제처럼 자랐다.
형부의 차를 타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진짜 친형제인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아이들이 컸다.
크고 좋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지는 않았지만,
작은 행복과 평안에 만족했다.
가끔 나는 청각장애가 있는 신랑과 살면서 외로움을 느꼈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가 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깔끔하고,
나를 많이 도와주고,
나를 믿어주는 신랑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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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떠나는 언니, 그리고 다시 찾아온 하나님
그런데 어느 날 형부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
막내언니네는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큰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내 마음은 무거웠다.
나는 그동안 언니를 너무 의지했던 모양이다.
언니가 떠난 뒤 나는 막내언니와 함께 가려던 농아교회를 찾아갔다.
그곳 목사님은 농아인이었고 사모님은 청각장애가 없는 분이었다.
나는 그곳에 다니며 수어를 배우려고 했다.
목사님은 농아인에게 수어가 중요하다며 작은 수어책도 주셨다.
그런데 신랑은 배우려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고집만 세어가지고. 싫으면 지 손해지. 알게 뭐야.’
한심하다 못해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신랑을 무시하는 마음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성질을 죽이고 신랑을 달랬더라면,
지금의 신랑은 수어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가 버렸다.
수어를 배우지는 않으면서 농아교회에 가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던 신랑.
나는 그곳에 가면 빨리 집에 오고 싶었다.
그저 신랑을 위한 마음으로 다녔다.
우리 집에서 시장으로 가는 길목의 사거리에서는 농아인 부부가 국화빵 장사를 했다.
신랑은 퇴근할 때면 어김없이 그곳에서 국화빵을 사왔다.
그런 신랑이 또 나를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신랑이 평소와 다르게 힘들어하며 비틀거렸다.
나는 술을 마셔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뇌종양이었다.
급하게 서울 성심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졸지에 과부가 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든,
그 사람은 내 남편이었다.
내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제야 내 마음속에 이미 신랑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내게 만들어 주신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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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또다시 흔들리는 삶
퇴원 후에도 신랑은 병원을 다녔다.
1년에 한 번씩 MRI 검사도 받았다.
그런데도 신랑은 새벽에 일어나 회사에 갔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했다.
좋지 않은 조건,
열악한 환경에서도 부지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 전철로 한 시간씩 출퇴근하는 것이 힘들다며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 했다.
그곳이 하필 신도시 개발 지역이었다.
언니와 상의했고, 아쉽지만 새 아파트를 팔고 평수가 작은 서민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매년 이사 다니는 것도 내겐 버거웠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때 장애인에게 국가에서 주는 혜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집이 재산으로 잡히니 신랑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아끼고 노력해서 겨우 산 좁은 아파트가 문제가 될 줄이야.
그래도 신랑이 노력한 대가로 얻은 재산이라 생각하며 만족하려 했다.
언니들은 자주 찾아왔다.
올 때는 반가웠다.
그런데 갈 때는 꼭 싸웠다.
“야! 넌 애 엄마가 청소도 안 하냐? 집 꼴이 이게 뭐냐! 귀신 나오겠다!”
게으르다,
지저분하다,
음식 유통기한이 지났다,
신랑이 뭐라고 안 하더냐…
잔소리가 끝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이고, 언니가 살림 사냐? 듣기 싫어. 내가 잘못해도 싫은 건 싫다.’
그런데 그때 나는 몰랐다.
언니에게도 병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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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떠나가는 사람들
그렇게 이 집에서 아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했다.
서울 언니의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졌다.
나는 막내언니가 서울에 있으니 잘 지내겠지 생각했다.
김포에 큰언니도 살고 있었다.
큰언니는 가끔 반찬을 가져다주고 백화점에도 함께 가주었다.
아들이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하필 강원도였다.
형부 차를 타고 아들을 보내면서 나는 또 다른 허전함을 느꼈다.
신랑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의논을 나는 아들과 하고 있었다.
아들은 일찍 철들었다.
부족한 부모에게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도 착하고 바르게 자랐다.
그런 아들이 고마웠다.
한 가지 흠이라면,
왜 안 좋은 건 나를 닮았는지.
지저분한 것도 나를 닮고,
수학은 꽝이었다.
나도 수학은 지지리도 못했다.
꽝! 꽝! 꽝!
아들이 씩씩하게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아들이 너무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막내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가 당뇨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큰 병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또 막내언니가 있으니 괜찮겠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사장이 집 앞 카페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또 뭐야? 뭔 소리를 하려고?’
구시렁거리며 만났다.
회사에 또 부도가 났다는 것이었다.
신랑의 월급과 퇴직금을 줄 돈이 없으니 회사에 남은 집기를 정리해서 꼭 갚겠다며 2년만 참아달라고 했다.
각서까지 썼다.
그런데 결국 종적을 감췄다.
신랑은 20년을 고생했다.
나는 그 사장이 인간 이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랑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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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오징어볶음과 3도 화상
신랑은 회사 문제로 힘들어했다.
나는 신랑이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 사장 욕을 했다.
“그런 영감이 무슨 사장 자격이 있어!”
“괜찮아! 뭐 어때! 안 죽어!”
신랑이 해야 할 말을 내가 했다.
잘난 척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실업급여로 생활하던 중, 20년 동안 사고 없이 성실하게 일해 온 신랑의 일솜씨를 알아본 회사들이 나타났다.
같은 일을 하는 두 회사에서 일해달라고 했다.
월급도 올랐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였고 새벽에 일어나야 했지만 신랑은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일했다.
나는 가끔 식탁에서 장난을 쳤다.
“나 안 무서워? 응? 내가 이 돈 들고 튀면 어쩌려고? 나 믿냐?”
어설픈 눈웃음.
신랑은 싸늘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무시하듯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신랑을 기다리며 반찬으로 오징어볶음을 하다가 잠깐 정신을 놓았다.
3도 화상을 입었다.
울고불고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아들을 찾았다.
그날 응급실도 바로 찾지 못했다.
하룻밤을 집에서 고통 속에 보냈다.
다음 날 입원했다.
신랑은 옆에서 피곤에 지쳐 쿨쿨 잠만 잤다.
나는 밤마다 울었다.
속으로 소리쳤다.
‘이이그! 악이 받쳐 베개가 날아간다. 나는 울고 있는데 지는 잠만 자!’
신랑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아프면 자기 생각만 하고 이기적이 된다더니,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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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언니의 마지막 눈빛
화상이 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화상이 낫고 나니 역류성 식도염이 찾아왔다.
아이고,
나 죽는다.
병이 막 덮치는 것 같았다.
그때 막내언니와 통화했다.
“얘, 막내야, 잘 있니?”
“웬일이야? 나 잘 지내. 화상 상처도 많이 나았어. 언니도 잘 있지?”
“응… 근데 언니가 요새 약을 잘 안 먹고 병이 좀 심해졌대. 어제 병원 다녀왔는데 많이 안 좋아졌나 봐.”
며칠 뒤 언니와 통화하면서 처음으로 언니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언니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막내언니가 나에게 말했다.
“너 잘 들어. 언니 어쩜 오늘 밤 넘기기 힘들 거야. 만나서 울고불고 하지 마. 알았어.”
곧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산소호흡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언니의 눈에서 눈물빛을 보았다.
나도 애써 웃고 있었지만 눈은 울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언니, 좋은데… 천국 가서 좋겠다. 빨리 가. 나도… 언니 따라 곧 갈 거다.”
그러고는 시선을 아들에게 돌렸다.
“아들이랑 같이 왔어.”
나는 살짝 아들 뒤에 숨듯 병실을 나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니가 방금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언니를 보내고 나니 허전했다.
후회도 밀려왔다.
함께했던 시간이 자꾸 생각났다.
나를 그렇게 혼내고,
놀리고,
도와주던 언니.
그때는 잔소리한다고 싫어했는데,
이제는 그 잔소리가 눈물 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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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또다시 나를 놀라게 하는 신랑
언니를 보내고 난 뒤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성숙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을 좋아해 자주 등산을 가던 신랑이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이런 때마다 신랑은 꼭 나를 답답하고 불안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산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고,
도움을 구하지 못한 신랑을 겨우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발목이 골절되었다.
수술을 받고 거의 한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나는 신랑을 병원에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있었다.
밤에 잠을 자다 침대에서 떨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밉지만 선뜻 돌아설 수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신랑의 눈에는 내가 예뻐 보이는 모양이었다.
검버섯에 다크서클.
내가 봐도 마귀할멈 같다.
신랑의 안목은 영 촌스러운 게 확실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신랑이 머리핀을 사준 건 딱 한 번이었다. 내가 머리를 길렀을 때 사준 머리핀 하나.
으악!
투박하고 촌스럽다.
‘지 눈에 안경이지.’
그 머리핀 하나 사주고 잘난 척은…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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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응급실에서
퇴원 후 신랑은 치료가 있는 날이면 오전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에 회사로 갔다.
약이 없으면 아들에게 부탁했다.
“뭐가 그렇게 회사 일이 많아? 회사에 엿 붙여놨나!”
그러던 신랑이 회사 주임이라는 사람을 점점 못마땅해했다.
항상 뒷짐 지고 감시하고,
재촉만 하고,
도움은 주지 않고 구석에서 담배만 피웠다.
신랑이 회사에서 제일 만만했던 모양이다.
술도 몇 번 마셨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랑이 갑자기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했다.
회사에 안 가겠다고 했다.
사실 신랑은 자격증은 없었지만 용접을 배워 회사에 용접공이 없을 때 대신했고,
지게차도 운전할 줄 알았다.
그만큼 일을 많이 했다.
회사에서 나에게 전화해 신랑을 나오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자기가 힘들고 싫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신랑이 싫다는데 나도 싫었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신랑이 나이가 많고 수어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신랑은 불안하고 무료한 탓인지 술을 마셨다.
그동안 쌓였던 아픔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일까.
화산처럼.
벌써 응급실을 여섯 번이나 찾았다.
응급실에서는 검사할 것은 다 했지만 특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정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도 못 넘기고 또 응급실.
감정의 기복도 심해졌다.
예전에 다니던 농아교회도 다시 찾아갔다.
취미생활도 찾아보려 했다.
그런데 신랑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없으니 더 답답했다.
무조건 아프다.
싫다.
어디가 아픈지,
무엇이 싫은지 나도 몰랐다.
어느 날 밤,
신랑이 대변을 볼 수 없다며 난리를 쳤다.
응급실에서 관장을 해야 했다.
간호사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장갑을 끼고 신랑의 엉덩이를 막고 있었다.
그 순간,
“으악!!! 퉤! 퉤! 퉤!”
간호사가 말했다.
“잠깐, 어머니가 꼭 막고 계세요! 곧 치워드릴게요.”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 영감이! 우웩! 켁켁! 숨 막혀!’
---
18장. 열이 나던 밤
관장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하루,
이틀,
사흘.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오한까지 왔다.
놀라서 또 응급실로 갔다.
이번에는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통제,
해열제,
각종 검사.
얼음주머니를 발로 차며 아파하는 신랑.
괴로워하는 신랑이 안쓰러우면서도 점점 괴물처럼 변해가는 것 같아 무서웠다.
신랑은 추운 듯 떨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환자가 추워하는 것 같은데 담요 좀…”
간호사가 말했다.
“열이 안 떨어져서 담요를 덮으면 안 돼요.”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환자가 춥다고 하던가요?”
나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
“내가 저 사람 처 되는 사람이거든요.”
간호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가버렸다.
나는 환자 옆에서 나가지 말고 지키고 있으라는 말에 꼼짝할 수 없었다.
보호자실에 있는 아들과 통화만 했다.
시간이 꽤 지나 젊은 의사가 왔다.
전립선염이 심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배움이 짧은 나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의사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여간 젊은 것들은 위아래가 없어.’
그날 신랑은 병동에 입원했다.
보호자가 함께 있을 수 없는 병동이었다.
환자 상태는 문자로 알려주고 면회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휴, 불행 중 다행이다. 신랑 병원에 입원시켰으니 나도 좀 쉬자.’
병원을 나와 아들과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너무 늦어 마땅한 곳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라면을 먹었다.
편하게 자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랑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응급실에서 아파하던 신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어랍쇼… 이젠 신랑이 나이 들어서까지 나를 울리네.”
그때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
19장. 아들에게 들켜버린 내 마음
다음 날 아들은 아빠가 집에서 먹던 약을 챙겨 병원에 가져다줘야 했다.
또 약속이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너 언제 오니? 아빠 면회 시간이 오후인지 밤인지 모르겠는데… 나 안 가봐도 되겠지?”
아들이 물었다.
“왜요? 엄마 아빠 면회 가고 싶으셔요?”
“아니 뭐 꼭 가고 싶어서라기보다… 그렇다고.”
아들은 빙그레 웃었다.
“일찍 다녀와서 엄마랑 면회 시간 맞춰 또 병원 갈게요.”
짜식.
엄마 마음을 고사이 읽어버렸다.
그날 아들과 병원에 갔다.
신랑은 열이 떨어지지 않아 해열제를 맞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리고 잠든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저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동안 응급실을 그렇게 왔다 갔다 했나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 저녁을 먹었다.
나는 또 괜한 소리를 했다.
“애 아빠 왜 저 모양이냐? 오늘 밤 병실에서 벼락이나 맞고 죽어버렸으면… 진짜 끝까지 힘들게 하네.”
옆에서 걷던 아들이 씩 웃었다.
“엄마! 마음에 없는 말 하지 마세요. 아까 울먹이셨으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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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혼자 있으니 편하긴 한데
그렇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들은 병원을 드나들었다.
나는 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거 너무 편했다.
한마디로 짱이었다.
늦잠 자도 되고,
밤늦게 불을 켜놔도 뭐라 하는 사람 없고,
냉장고 속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그런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염증도 잡혔고 열도 내렸다.
환자가 일어나서 퇴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생각했다.
‘건강을 찾았으니 퇴원하는구나.’
일요일 퇴원이었다.
나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야 했다.
아들이 말했다.
“엄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일찍 아빠 퇴원시켜 집에 모셔드리고 저도 뒤따라 교회 갈게요.”
아들은 나를 안심시켰다.
교회에서 아들을 만났다.
“아빠 집에 계시니?”
“네. 건강이 좋아지셔서 이제 멀쩡하세요.”
그동안 병원에 자주 가지 않았던 터라 신랑을 마주하기가 조금 서먹할 것 같았다.
예배를 마치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갔다.
집에 들어서니 신랑이 TV 앞에서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나는 쪼르르 신랑 앞에 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멀쩡하셔! 여기서 뛰어내리시면 돌아가실 텐데!”
신랑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자기는 그동안 아무 기억도 없다는 듯했다.
나는 말했다.
“그동안 내가 놀란 걸 생각하면…”
공치사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들이 더 많이 힘들고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아닌겨?
---
21장. 두 그릇의 밥
저녁이 되었다.
신랑이 밥을 두 그릇 먹었다.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니 아빠 이상하지 않니? 오늘 아침에 퇴원한 사람이 저래도 돼? 아무래도 이상해.”
아들이 웃었다.
“에이, 엄마! 왜 그러셔요. 아빠 병실에서도 깨어나셔서 금방 좋아지셨어요. 원래 건강하시기도 하고요.”
“하긴…”
신랑은 음식을 먹을 때 나와 달랐다.
남기거나 흘리지 않았다.
깔끔했다.
오히려 남기고 묻히는 건 나였다.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가 보다.
나는 신랑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살아남는 걸까.
아니,
왜 하나님은 이 사람을 계속 내 곁에 두시는 걸까.
---
22장. 한 알의 씨앗
까만 밤.
나는 왠지 허전했다.
그리웠다.
무엇이 그리운지도 몰랐다.
그렇다.
내게는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다.
배움도 짧고,
부자도 아니고,
몸에도 병이 있고,
모든 것이 부족하다.
나는 작가도 아니다.
내년이면 예순을 바라본다.
그렇다고 내 인생을 부끄러워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모르는 그 길에서
나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함께하실 하나님이 계시고,
내 곁에는 신랑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신랑과 나의 만남은 참 어색했다.
쇼윈도 안의 마네킹 신부를 바라보던 어린 내가,
사진 속 한 남자를 보고 잘생겼다고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에는 수많은 일이 있었다.
첫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또 아이를 낳고,
아이와 떨어져 살고,
인천으로 이사하고,
직장을 잃고,
돈 때문에 울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신랑을 미워하고,
헤어지고 싶어 하고,
다시 붙잡고,
병원 응급실을 수도 없이 오가고,
언니들을 보내고,
또 울고,
또 웃었다.
나는 인간이라서
쉬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또 죄를 짓고,
울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그렇게 돌고 돌아 내 인생을 살아왔다.
첫아이를 잃고 나는 그 아이가 딸이었기에,
어쩌면 사춘기가 되어 부모인 나와 신랑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할까 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작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아이를 하나만 주셨다면
그 아이가 여러 명 몫을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내게 하나님이 주신 첫 선물이었다.
사장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한 돈을 주지 않고 몇 번이고 사라진 그 사람의 양심과 훗날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다.
나는 신랑의 뇌종양 수술을 겪고서야
신랑의 자리가 내 마음속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내가 만든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보내신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주 늦게 깨달았다.
한때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삶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막 한가운데에
오아시스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신랑의 성실함,
묵묵함,
책임감,
그리고 나를 믿어주었던 마음.
그 모든 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사랑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좋은 아내도 아니었고,
신랑 역시 완벽한 남편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오해했고,
때로는 미워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셨다.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듯,
처음에는 쇼윈도 불빛 하나로 내게 다가왔던 그 사람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가 되고,
내 곁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되어
꽃과 열매를 맺어주었다.
그 나무를 누가 심으셨을까.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하나님께서 심으셨다고.
내 인생과 신랑의 인생이
마치 짜인 각본처럼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이에 개입하셨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이제
우리 둘이 만든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작가도 아니다.
배움도 짧다.
내 글에는 사투리도 섞이고,
맞춤법도 틀리고,
때로는 말이 앞뒤 없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포장하고 싶지 않다.
부풀리고 싶지도 않다.
없었던 일을 만들어 넣고 싶지도 않다.
내가 못났던 모습도,
웃겼던 모습도,
이기적이었던 모습도,
울었던 모습도,
신랑을 미워했던 마음도
그대로 남기고 싶다.
왜냐하면 그 모든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키셨고,
길을 잃으면 다시 돌아오게 하셨고,
내가 사랑을 몰랐을 때도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다.
나는 이제 내 남은 인생에서
한 가지를 하고 싶다.
복음을 전하고 싶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나도 하나님께 돌아가야겠다.”
하는 작은 마음 하나를 심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면 좋겠다.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하루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리고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조용히 일하고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 인생도
작은 한 알의 씨앗인지 모른다.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시면
어느 날 작은 싹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싹은 나무가 되고,
나무는 그늘이 되고,
그 그늘 아래 누군가가 쉬게 된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마네킹 신부로 시작한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나무 아래에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이고,
내가 앞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마네킹 신부》
— 하나님이 맺어주신 신랑과 나의 만남.
부족한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를 통해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네킹 신부 — 철없던 사랑을 했던 내가 뒤늦게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
마네킹신부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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