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pp4Cehuv14
위의 링크는 제가 저희 교회를 부임하고 있었던 내용을 간증했던 영상입니다.
그리고 영상에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글로도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전남광주특별시 무안군 오룡신도시에 최초교회 오룡영은교회를 섬기는 한능력 목사라고 합니다.
저는 감리교 목사지만, 저의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님이셨고 <89년도에 새롭게 하소서 라디오>에 나오셔서 간증도 하셨습니다. 만약 새롭게 하소서에 출현하게 된다면 2대가 새롭게 하소서에 나와서 간증할 수 있는 영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있는 곳은 오룡 신도시에 있는 최초 교회이자 유일한 교회 입니다. 지금은 이단 하나님의 교회가 들어오긴 했지만 정통교단으로는 저희가 아직 최초이자 유일한 교회입니다. 행정 구역은 무안이지만 목포와 가깝기 때문에 목포와 무안이 함께 어우러진 도시이며, 신도시임에도 교회가 전혀 없던 곳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이전 시키시어 복음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어떻게 일하셨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2022년 2월 22일, 성도가 두 명뿐인 교회에 7대 담임자로 부임했습니다. 전국 감리교에서 가장 열악하다는 교회였습니다. 그 전에 저는 가장 큰 감리교에서 사역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는 공부에 관심이 있어서 유학을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저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1. 네 번을 거절하고 순종하게 된 단독 목회의 부르심
저는 담임 목회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안하겠다고 하는 것만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목회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목사의 어려움을 알아서 목사가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사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상가도 싫었습니다. 월세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하게 하셨습니다. 원래 유학을 준비하다가 하나님께서 한국으로 남게 하셨을 때 강원도 삼척에 있는 호산교회라는 곳에 부임하게 됩니다. 호산은 삼척에서 차로 40분을 타고 가야 하는 시골에 있는 교회 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그냥 부교역자로 목회를 하다가 언젠가 때가 되면 담임이 되지 않을까? 라는 막역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부교역자로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에게 “능력아, 너 단독 목회를 할래?”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습니다. "아니오" 왜냐하면 삼척으로의 부르심이 있기에 이곳에 부르셨을텐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내도 동해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형편도 넉넉했습니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단독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기에 거절했습니다. 아마 이 마음에는 단독 목회(개척교회)로의 부름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 저에게 콜링을 하셨고 저는 3번을 더 거절했습니다.
그러다가 네번 째 부르심이 왔을 때, 저는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평생 주의 종의 길을 갈 것이라면 재정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했는데, 어떤 교회와 컨텍이 되었고 그곳으로 가려나 했는데 무산되었습니다. 이때 상황이 섬기던 교회에는 이야기가 다 되었다고 말하고 2월 말에는 사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월 초에 못 간다는 연락을 받아서 소위 어그러진 것이지요. 그런데 사택도 비워야 하고 이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자? 싶었습니다. ‘목회를 잠시 쉬어야 하나’ 싶어 지인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다니던 중, 일주일 만에 연결된 곳이 바로 지금의 영은교회 였습니다.(오룡영은교회의 이전 이름) 솔직히 그때 우리 교회가 이렇게까지 열악한 곳인 줄 알았으면 가지 않았을 겁니다. 웃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2. 두 사람이 있는 교회
오룡영은교회는 1985년 11월 26일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기도하던 권사님과 몇 분이 교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모여서 기도하던 곳이 서울의 모 교회를 통해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영암 삼호라는 지역에 514평 부지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2022년 2월 22일 첫 단독 목회로 나가게 된 곳의 전교인은 총 2명이었습니다. 87세 여자 권사님, 55세 뇌병변 장애가 있으신 남자 집사님 한분이었습니다. 산 밑에 있는 교회 사택은 슬레이트 지붕에 비닐하우스로 되어 있는 교회 였으며, 그마저도 비닐하우스가 구멍이 나 있어 굉장히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교회도 밭 위에 가건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부임할 때 지방의 큰 어른 목사님이 제게 해주셨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 납니다. “감리교에는 열두 개의 연회가 있는데, 호남연회가(당시 호남특별연회) 가장 열악하다. 이 호남연회에 여덟 개 지방이 있는데 그중 우리가 있는 전남서지방이 가장 열악하다. 그 지방에는 서른네 개 교회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영은교회가 가장 열악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전국 꼴찌 교회라는 말이야.” 그러고는 덧붙이셨습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마.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영은교회는 이제 올라갈 일밖에 없어.” 저는 그 말씀이 참 위로가 되었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교회에 도착했을 때 성도는 두 분이었습니다. 87세이신 박영희 권사님(지금은 명예장로님), 그리고 55세에 뇌병변 장애가 있으신 진필남 집사님이었습니다. 진 집사님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으신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그렇게 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예배당에 들어오실 수 없어서, 부축하고 계단을 오르면 저도 땀이 났습니다. 부임하고 처음 예배드리던 날 진 집사님을 부축하고 돌아오는데 요령이 없어서 진땀을 빼느라 11시 예배를 11시 반에 시작했습니다.
2022년의 영은교회는 마치 1970년대에 멈춰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었습니다. 교회 화장실이 낙후되고 위험하여 폐쇄를 시켰기 때문에 성도들이 예배를 끝나고 마녀 밖에서 볼일을 보셔야 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3. 화장실 하나에서 시작된 일
부임하자마자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지금 21세기인 2022년인데, 교회 화장실이 없으면 무슨 전도가 됩니까? 하나님, 화장실 주세요.” 그리고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2주 만에 화장실 공사 대금이 모였습니다. 어떤 교회가 마음의 감동이 와서 헌금을 해주셔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 사택을 놓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는데, 사택도 그 비닐하우스를 걷어내고 샌드위치 판넬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교회 부임하자마자 화장실이 생기고 사택이 고쳐지고 일이 조금씩 진행이 되자 지방 목사님들 중 몇몇 분은 “아니, 화장실을 어떻게 해결했지?” 하고 놀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 것부터 채워 주셨습니다.
4. 87세 권사님과 아홉 시간의 기도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안 좋은 일도 같이 온다는 말입니다. 2022년 부활절 다음 날 영은교회의 화장실 공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화장실 공사를 시작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박 권사님이 집에서 옷을 걸다가 넘어지셨는데, 오른쪽 고관절이 부러지셨습니다. 권사님의 말로는 어지러운 것도 아니었꼬 그냥 알 수 없는 힘에 자기가 패대기쳐지듯이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87세에 고관절이 부러지면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권사님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교회에서 죽을 거야.” 끝까지 교회를 지키시겠다는 분이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 큰 교회를 섬기는 큰딸이 그날 아홉 시간 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를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이제 겨우 두 사람뿐인 교회에 전도사님이 오셨는데, 어머니마저 데려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켜 주세요.” 감사하게도 권사님은 한 달 만에 교회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뒤로 1년 동안, 저희는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면 매주 권사님 댁에 가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5. 2,000만 원과 멸치 장수
그런데 교회에는 화장실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514평 땅이 1대 목사님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3개의 필지로 되어 있는데, 1개는 교단 명의로 되어 있고, 2개의 밭으로 되어 있다보니 개인의 이름으로 소유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밭은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의 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대 목사님께서 등기 권리증등 다 주고 가셨지만 정작 명의를 받아와야 하니 이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저희 교회는 공단이 들어오면서 맹지가 되어서 땅을 팔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러간 것입니다. 제가 부임하자마자 해결해야 할 숙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대 목사님을 수소문 끝에 찾아서 통화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세금 2,000만 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두 명 교회에 2,000만 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땅을 찾는 과정에서 교회를 철거해야 하는 문제까지 겹쳤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남특별연회의 감독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분을 만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선교 멸치를 팔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아내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우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실행했습니다. 이때 지방 감리사님과 감독님의 추천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국 교회에 선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사정을 알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으로 멸치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2022년 11월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한달만에 천만원이 모였습니다. 멸치만 팔아서 나온 금액이 아닙니다. 한 개 밖에 못 사는데 어떻게 하냐고 미안해하시지만 그 따뜻한 손길, 또 후원금등이 모여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수요예배를 오전에 드렸는데 주기도문을 하면서 예배를 마무리 하고 있는데 입금이 되었다는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 선교를 나가지 못하게 된 어느 교회가 저희 사정을 듣고 보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날로 딱 2,000만 원이 채워졌습니다. 2022년이 다 가기전에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정교하게 일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멸치파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먼저 제 건강이 무너졌습니다. 땅 명의를 찾아 오는 과정과 교회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머리가 확확 빠지는게 보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른 후반의 나이에 급성 당뇨가 온 것입니다. 입술이 마르기 시작하고 소변이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그러니 3주 만에 12킬로가 빠졌습니다. 저는 갈증이 뭔지를 압니다. 무언가를 먹어도 자꾸 목이 마르고 입술이 마르는 것입니다. 알고 봤떠니 당화혈색소 수치가 13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당화혈색소는 3개월마다 당 상태가 어떤지 체크하는 것인데 정상인이 5.4-5.7인것을 봤을 때 13은 정말 엄청난 수치였습니다. 그렇게 건강이 안 좋아지자 큰 병원 의사 선생님은 저에게 그러다가 갑자기 쓰려져서 객사해도 안 이상하다고 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혼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사역했던 동해의 어느 권사님이 지방 총 여선교회장이 되신겁니다. 그때 저희 교회 사정을 아시고 동해삼척지방 여선교회분들에게 말씀하셔서 멸치 600박스를 주문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택배로 보낼 수 있었지만 그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손위처남 형님이 도와주셔서 7시간 이라고 하는 먼 길을 운전해 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제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건강이 아니라 순종이었구나 싶습니다. 지금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저와 제 아내의 건강을 바꾼 교회라고 말입니다.
6. 오룡, 33평 상가 교회
그다음 결정이 이제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였습니다. 그렇게 가게 된 것이 지금의 오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명의 기도가 트라이앵글을 이뤄지게 하셔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박 권사님의 100가정 500성도를 놓고 기도하는 제목이었습니다. 박영애 권사님은 저희 교회 창립기념주일부터 나오시던 분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0가정 500성도를 위해 기도해 오셨고, 진 집사님은 서두에도 말씀드린 대로 원래는 몸이 건강하셨지만 교통사고로 뇌병변 장애에 처하게 되신 것입니다. 하루는 아내 모교의 원로 목사님이 몇명 안되지만 저희 교회 부흥회를 오셨고 진집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집사님, 소원이 뭐예요?" 그러자 집사님께서는 우리 영은교회가 세상 중심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하셨습니다. 저희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제목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저의 "남악" 이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집이 서울이고, 아내는 인천 사람입니다. 연고지도 없는 곳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오게 되었는데, 이 지역을 어떻게 알까요? 목포의 목자도 모르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지속적으로 "남악"(오룡 옆의 무안군에 속한 신도시로 오룡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아니 지금도 핫한 신도시이다)이라는 지역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남악의 어디로 부르실건가 했는데 오룡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룡은 남악 신도시의 바로 옆에 조그마한 신도시로, 송도 신도시와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무안 오룡은 1지구와 2지구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1지구는 아카데미 빌리지라고 해서 교육 도시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그래서 상가를 지으면 30%가 학원이 들어와야 하는 특수한 도시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위 목포, 해남등의 학구열에 관심 있는 젊은 엄마들은 다 이곳으로 모인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집 값도 땅 값도 비쌉니다. 처음에 건축을 하려고 알 아 볼 때 193평이 16억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건축까지 한다면 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지만 건축하자! 하면서 멸치를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장로님이 이것을 보실 수 있을까? 우리 성도들이 이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 기도 하던 끝에 상가로 임대하기로 하였고 지금의 상가로 이전했습니다.
상가 2층 33평을 임대했습니다.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132만 원(월세 120만원, 부가세 10%인 12만원이 포함된 금액), 공과금까지 하면 매달 160만 원이 나가는 자리였습니다. 3년을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공실을 빌려서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데 보증금을 내고 나자 당시 통장에 남은 돈은 500만 원뿐이었습니다. 주변 목사님들은 “한 전도사 미쳤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압니다.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 월세 어떻게 감당하냐? 너네도 살아야지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전을 해야 영은교회가 산다는 확신하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축을 하시는 아는 목사님에게 “저희 500만 원밖에 없는데 공사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정말 공사가 되었습니다. 인권비는 현금 기자재는 카드로 하는 식으로 해서 진행했는데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예배당 반, 카페 반으로 꾸몄습니다. 2023년 9월 5일, 호남특별연회 감독님을 모시고 이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해 박영애 권사님을 명예 장로로 추대해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박영애 장로님이 이 교회를 지키지 않았다면 폐쇄가 되었을 것입니다. 장로님께 장로 직분 받으셔야 한다고 할 때 장로님은 절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권사님, 이 교회가 1주년때부터 계신분이시고 권사님이 이 교회를 떠나셨으면 교회는 사라졌을 거예요. 그런데 권사님이 지키시고 믿음으로 심으시니까 지금 오룡으로도 왔잖아요. 이런 분을 장로 안 드리면 대체 누가 장로를 할까요?" 그러자 장로님도 수긍하시고 받으셨습니다. 지금 91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11시 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어렵게 왔지만 이제 모든게 잘 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변 목회자들도 그랬습니다. "한 전도사 됐어. 고생하고 신도시에 왔으니까 좀만 버텨 이제 잘 될거야."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7. 아무도 오지 않던 시간 (3년의 고군분투, 눈물의 40주년 예배와 송구영신 예배)
신도시로 나가면 사람이 오겠지 싶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해 전도하고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척을 했는데 학원가와 술집은 북적거렸지만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팝콘 전도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유튜브도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더 잘 갖춰진 큰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멸치를 팔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입니까.” 몇몇 분들이 예배당을 찾아 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정착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좋은데, 사람이 너무 없네요.." "거기 중고등부 예배 있나요? 애들 몇명인가요? 초등부 예배는 있나요?"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고 교사가 없었고 심지어 저와 아내는 몸이 불편하신 박장로님과 진권사님을 한분씩 케어해야 했기 떄문입니다.
그러다가 2024년 11월에 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다니엘 기도회를 하던 때, 매일 활짝 열어놓던 문을 닫고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비오는 목요일 저녁 9시 45분에 문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보니 어머니와 따님이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다닐 교회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따님이 뭐하시냐고 물으니 학원 원장님이라고 했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그 분들이 가신 후에 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에 그분들이 예배를 나오셨는데 예배가 끝나고 그 자매님이 등록을 하신다고 하셨고, 반주로 섬겨도 되냐고 물으셨습니다. 미국에서 피아노 박사를 하고 오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성도들이 오게 하셨습니다. 창립기념주일에도 오게 하시고 한동안은 새가족이 매번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사하게 호남연회에서 주최한 전도대회 결승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간증하게 하셨고, 전도사로는 유일하게 결승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가 성장하는 것 그리고 성도들이 정착까지 이어지는 길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극심한 번아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야처럼 따지기도 했습니다. "만군의 열심이 유별하오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저를 꾸짖지 않으시고 저를 다독이시며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특히 제 아내가 없었다면 더욱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부 목사로서의 장점은 목회적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이고, 모든 시기에 아내가 큰 역할을 했지만 정말 아내 송목사님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도 너무가 감사하기만 합니다. 아내는 저보다 먼저 2024년에 안수를 받았고, 저는 2025년 4월 25일, 공교롭게도 제 생일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또 한번의 아픔을 주셨습니다. 2025년 8월, 진필남 권사님께서 소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은 2024년 12월 경에 직장암 말기를 판정 받으셨고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안 그래도 교인이 2명이 전부인데 그 한분마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감사하게도 청년 1명아 왔었는데 이 청년도 군 문제로 인해 잠시 떠나 있던 상태였습니다.
2025년 11월 26일 저희 교회는 40주년 창립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이전하여 재개척한 것은 만 2년이었지만 교회 자체로는 40주년이 된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 본문을 가지고 설교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우리 교회는 비정상적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실패한 투자였습니다. 매달 16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내면서 사람 하나 없는 교회를 유지하는 것은 낭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이야기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땅을 값으로 사서, 장차 하나님이 주실 땅에 대한 믿음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것을 ‘거룩한 낭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것은 월세가 아니라 선교요 사명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날 저는 울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남기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영원한 기업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먼 훗날 이 오룡에 교회가 하나도 없던 곳에 어떻게 복음이 퍼져 나갔냐고 묻는다면 오룡영은교회가 버티고 전도 했기에 그렇게 됐다라는 전초 기지가 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갈등과 어려움의 요소가 오기도 했습니다. 2025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석한 사람은 저희 부부와 장로님 한분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연세가 90세이신데 내년에도 계실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께 교회의 존재 이유를 계속 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한 사람 남았는데 이 교회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저는 매일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 2026년 7월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떠날까요? 남을까요?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까지 오룡으로 이전했지만 저는 여기 까지 일까요?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 앞까지 인도는 했지만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 것처럼 나의 사명은 이것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내과 저에게 동시에 재계약을 하라는 순종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또 하나의 반전을 보여주셨습니다.
8. 2026년 1월 둘째 주, 사람이 오는 것을 넘어 정착이 되다.
2026년 1월 둘째 주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다섯, 여섯 명이 가족으로 들어왔습니다. 어 느날 저녁에 버스를 잘못 내린 분이 교회 불빛을 보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계획해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신 것 같았습니다. 또 어느 가정이 유튜브와 블로그를 보고 찾아 왔습니다.
올해 5월 25일 전주에서 호남연회 전도대회가 있었습니다. 재적 인원이 두 명인 교회가 20명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 대회에서 저희가 최다 참석 1등 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 후속 프로그램으로 7.19 전도 대회를 했습니다. 저희 교회 총 좌석이 30석입니다. 그리고 이떄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 본당 30석인데 이번에는 30명이 오게 해주세요." 결과는 33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0719 전도 대회에도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룡영은교회는 희망의 아이콘이야."
9. 하박국 3장 2절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를 응답하신 하나님
하박국은 하나님께 따진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왜 이 땅에 강포와 겁탈이 있습니까, 왜 악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나서 한 고백이 하박국 3장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교회를 살리려고 멸치를 팔려던 2022년 11월 13일 주일에 이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봅시다. 3년 뒤에, 아니 조금 더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는지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단에서 선포한 그 내용을 정확히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지금은 2명에서 20명 재적, 16-18명이 매주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 교회는 아주 열악하고 약한 교회일지 모르지만, 너네 월세나 감당하지 무슨 선교야 할지 모르겠지만, 영국을 품으며 나아가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10월 5일 - 14일 저와 아내를 먼저 정탐꾼으로서 영국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이지만 이들에게도 우리가 선교를 왜 해야하는지를 알리며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군데에서 간증하며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오룡영은교회는 희망의 아이콘이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좋습니다. 가장 약한 우리가 된다면 다른 교회도 누구나 다 희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약하다는 감리교회의 호남연회도 희망의 아이콘이요, 우리 모두 희망의 아이콘이 될 줄 믿습니다. 이 이야기를 새롭게 하소서에서 간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려봅니다.

<전남 무안군 오룡최초교회> 오룡영은교회 이야기 (Feat. 멸치 판매, 부부 목사)
무한고고싱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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