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전도합니다
hiheoung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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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좋은우리교회 담임목사이며, 천안택시 운송회사 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통해 광야라는 길을 걷게 하시고 목회자로서 빗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한 사람의 인생 속에, 실은 죽음의 골짜기를 몇 번이나 지나게 하시고 그때마다 손을 붙드셨던 하나님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발자국을 이 자리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1. 가족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저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린 나이에 할머니 손에 맡겨져 자라신 아버지에게, 술은 아마도 채워지지 않은 그리움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술이 깨고 나면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방바닥에 무릎 꿇려 놓고, 당신이 살아온 서러운 세월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쏟아내셨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지금도 다리의 저림으로 기억합니다. 부모님의 다툼이 그치지 않던 그 집은, 어린 저에게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매일 밤 살얼음판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화가 치민 아버지가 곤로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불씨는 순식간에 커튼으로 옮겨붙었고, 집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어머니는 살기 위해 유리창을 깨고 뛰쳐나오셨지만, 그 대가로 온몸에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붕대에 감긴 어머니의 모습을 보던 그날, 어린 저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씨앗이 깊이 박혔습니다. 그 미움은 훗날 제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순간까지도 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역시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라시다, 중매로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생활력 하나로 버텨야 했던 어머니는 하숙을 치고, 식당을 하고, 식당을 꾸리며 안 해 본 일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종교가 없으셨고, 어머니는 무속에 마음을 의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 그 한복판에서 저는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얼굴에 늘 그늘진 내성적인 저는 외톨이 처럼 혼자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택시를 한 대, 두 대 사들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천안택시'라는 회사를 세우셨습니다. 극장 간판을 그리며 근근히 생활 하셨던 아버지는 사장이 되고 어머니는 전무가 되어 회사를 일으키셨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의 어둠이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2. 목회의 길로 부르시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던 저는 학생 찬양대에 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를 못한다는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열외를 당했고, 그 서운함에 저는 다시 교회를 등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저의 첫걸음은 그렇게 초라하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뜻밖의 방법으로 저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이사 간 집 바로 옆에 작은 개척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 목사님 댁의 두 자녀가 저희 집 마당으로 놀러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 계획도 의도도 없던 그 아이들과의 만남이, 저를 다시 교회로 이끄는 길이 되었습니다. 할머니 몇 분이 전부였던 그 작고 초라한 교회에서, 저는 유일한 청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저에게 중고등부 교사라는 자리를 맡기셨습니다.
정작 저 자신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매주 아이들 앞에 서서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 부담감에 떠밀리듯 대학생 선교회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비로소 성경을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삼각산 기도처로 데리고 다니시며 밤새 기도하는 법을 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밤을 새워 철야기도를 드리시던 목사님이 동상으로 발이 부르튼 채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님은 교회 빚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가진 것 없이 오직 기도와 헌신만으로 버티던 그 목회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뜨거운 열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 그 열망 하나가 저를 신학대학원으로 이끌었습니다.

3. 영적인 체험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저희 집 옆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날 누님은 저에게 부흥회에 함께 가자고 하였고 저는 누님을 따라 부흥회에 갔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찬송을 하던 목사님이 안수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목사님의 손이 제 머리 위에 닿자 마자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처럼 뜨거움이 들어오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위 아래로 점프를 해가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끝마쳤을 때 남은 사람은 저와 누님 뿐이었습니다. 그 밤에 성령님이 저를 찾아 온 것입니다.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 교육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주미산 기도원으로 수련회를 갔는데 마지막 밤 기도회를 인도 하였는데 아이들이 성령 체험을 원하며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짝기도를 하는 순간 아이들 중 한 아이는 자기 머리를 뽑고 한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히 기도원 원장님과 금식기도 하는 목사님을 불렀는데 귀신들린 아이가 입을 열며 큰놈과 작은놈이 오네 라고 말했습니다. 찬송을 하자 귀신이 더 날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밤 축귀 사역은 저에게 잊지 못할 영적인 체험을 만나게 했습니다. 그후 축사사역과 치유사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4.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며
대학생 선교회에서 순장과 순원으로 만난 아내와 결혼한 뒤, 저는 서울에서 부교역자로 사역을 시작했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개척지를 찾아 울산의 한 개척자 모집에 지원했지만, "교회를 지어줄 테니 고향으로 오라"는 부모님의 부름에 결국 천안으로 돌아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내디딘 그 첫걸음과 동시에,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자마자 온 나라가 IMF 외환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택시회사는 강성 노조의 파업에 발목이 잡혀 휘청거리다 결국 경매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평생을 일궈 온 회사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담담하셨습니다. 술도 드시지 않은 채 자전거를 타고 나가, 오랜 세월 함께한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아끼던 물건들을 하나씩 나눠 주시고, 마지막에는 타고 다니시던 자전거마저 다른 이에게 건네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이 세상과 나누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는 것을, 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유서를 쓰신 뒤 제초제를 드셨습니다.
아들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낯설고 알아듣기 어려운 설교를 예배당 한켠에 조용히 앉아 듣고 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평생 아버지에게 용돈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를, 저는 진심으로 미워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손에 쥐어 주신 것은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습니다. 그 두 장의 지폐가, 평생 표현하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저는 훗날에야 깨달았습니다. 병원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순간, 곁을 지킨 가족은 저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도 제 마음 한켠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은 빚을 갚지 못한 어머니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셨습니다. 매형의 주식 투자 실패로 집안이 부도를 맞자, 그 충격으로 큰누님은 정신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갇히고, 누님은 병상에 눕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저에게 닥쳐왔습니다. 아내는 아버님 사망소식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아내는 우울증을 넘어 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폐쇄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깨어지고 개척한 교회마저 경매로 넘어갈 위기 앞에서, 그야말로 사면초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 저는 강대상 아래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 절규 속에서 하나님이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이 바로 이사야 41장 10절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말씀은 제게 이론이 아니라, 숨이 막히던 순간에 던져진 생명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혹했습니다.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단전이 되었고, 한 달 넘도록 냉장고 안의 음식은 썩어 갔으며, 저녁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사택을 나와 멀리 보이는 아파트 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창마다 켜진 불빛들이 그렇게 휘황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불빛을 보며 저는 소리 내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집의 전기가 다시 들어오게 하시고 물질을 채워 주시면, 저처럼 단전된 가정들을 찾아가 돕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초라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한전신우회를 비롯한 여러 손길이 후원으로 이어졌고, 저는 '반딧불 운동본부'를 세워 단전된 가정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밀린 전기요금을 대신 갚아 드리고, 쌀 한 가마니와 성경책을 손에 쥐여 드리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굴다리 아래에서 끼니를 거르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는 구제 사역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어두운 자리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찬양합니다! 아내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내적치유 사역을 받았습니다. 치유사역 중에 약봉지를 버리고
토설과 용서 사랑의 복음의 통해 완전히 완치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내와 함께 치유사역을 받으면서 내 안에 감춰진 내면 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회개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내 마음에 깊이 뿌리 박았던 쓴 뿌리가 뽑히고 영적인 자유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영혼을 치유하는 사역자의 길로 드러 서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넘어 사명의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5. 택시회사를 통해 보여 주신 비전
한편, 교도소라는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어머니는 참으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좁은 감방 안에서 어머니는 기적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고,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것은 평생 무속에 마음을 의지하셨던 어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석방되셨고, 무려 10년에 걸친 긴 재판 끝에 노조에 빼앗겼던 회사를 마침내 되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회사가 다시 안정을 찾자 어머니는 서서히 교회 나가는 발걸음을 끊으셨고, 감옥에서 받은 그 은혜와 감사의 자리를 잊어 가셨습니다. 결국 회사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고, 어머니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저와 형님이 회사를 물려받아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게는 오직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운수회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 되시는 기업이 되는 것, 그리고 이 일터에서 흘러나오는 열매가 언젠가 북한 선교를 위해 값지게 쓰이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주님의 뜻대로 이 회사를 운영하는 종이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복음을 싣고 거리를 달리는 택시회사가 되게 하소서.

6. 지방회에서 시작된 365일 전도운동
제가 섬기는 교회는 26개 교회로 이루어진 천안중앙지방회에 속해 있습니다. 제가 지방회 회장으로 섬기던 어느 해, 추수감사절 헌금을 개척교회를 위해 사용하자는 안건이 나왔고, 그 방법으로 전도운동에 참여하는 목사님들을 지원하자는 뜻이 모아졌습니다.
저희 지방회의 한길교회 목사님은 늘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목회가 참 행복합니다." 그 행복의 비결은 다름 아닌 '전도'에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을 중심으로 매일 전도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목회자들이 돌아가며 서로의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전도하며, 나머지 평일에는 각자의 교회에서 전도의 발걸음을 이어 갔습니다. 이 작은 움직임은 저희 침례교단의 울타리를 넘어,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에게까지 조용히 번져 나갔습니다.
저와 목사님들이 365일 전도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길교회 목사님의 '행복 전도' 바이러스에 완전히 감염되어, 저 역시 전도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참된 목회의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상가로, 아파트 단지로 나가 아내와 함께 물티슈 한 장을 건네며 복음을 전합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늘도 저는 전도의 발걸음을 삶의 현장으로 옮깁니다.
알콜중독자의 아들로 태어나, 화재와 자살과 수감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저를,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상처와 결핍 위에 은혜의 집을 지으시고, 저를 세워 치유자와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365일 전도하는 목회자로, 영혼을 치유하는 사역자로 그리고 복음을 실어 나르는 회사의 대표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 모든 은혜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