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개월의 달력ㅡ 무.지.개
rabbit2
2003.12.11
조회 73
▶우리 어렸을 적, 들판을 가로지르며 풀꽃냄새 맡아가며 정답게 놀던 중, 한바탕 퍼부어대는 소나기가 비켜가면 파아란 하늘끝에 그려져있는 일곱빛깔 무지개를 기억하시나요? . . . [ 12개월의 달력ㅡ 무.지.개 ] 계단을 올라가면 조그마한 옥탑방에 누이가 있다. 작고 보드런 다리가 유난히 가늘던 하얀 누이, 그 방 창 아래 피어 있던 파란 나팔꽃 화분에 물을 주러 옥상에 오를 때면 방안의 누이를 살피며 살금살금 발끝이 조심스러웠다. 왠종일 누워있는 하얀 누이, 수국처럼 파랗고 줄기처럼 가늘던 누이의 손목,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면 방 안 가득 물결치던 아련한 살냄새 ... 빳빳하던 나팔꽃잎이 뜨거운 오후 볕에 봉지처럼 쪼그라들 때면 나는 옥상 바닥에 물을 뿌리고 열이 식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 문틈으로 송글송글 땀 맺힌 이마를 드러내며 뽀얗게 웃던 누이의 얼굴. 누이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해질녘까지 앞들의 반딧불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아이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되어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무지개였을 기구마.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맨날 무지개 생기는 꿈을 안꾸나. 그러면 마음에 무슨 독이라도 질러진 것 맨쿠로 가슴이 콱 막히도록 그렇게 좋았지를 ..." "누부야, 걱정 마라. 소나기가 오다 그치면 무지개가 생길 기구마. 그러면 내가 꼭 무지개를 보여 줄 기다." "누부야, 이게 무슨 고긴 줄 아나? 이게 자라면 큰 잉어가 되는 기라. 이걸 고아서 먹으면 장사처럼 힘이 솟는다 안하나. 아랫마을 은환이 어무이도 은환이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이거 먹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를... 밥도 많이 주야 되는 기라. 그래야 고기가 빨리빨리 자라지..." "싫다. 내 힘 낼라고 그 예쁜 걸 잡아먹나. 내 몸이 중하면 다른 목숨도 중한 기라. 나는 고기들이 병 속에서 헤엄치는 모양만 봐도 벌써 힘이 솟는데이." "알겠다. 그라믄 이거 보고 튼튼해지면 도랑에 고기 놓아주러 나랑 함께 가는거다." 나의 거짓말에 함박웃음 지어 보이던 착한 누이, 그런 누이가 흰 깃 같은 눈썹을 찡그릴 때면 가루약처럼 스며들던 하얀 슬픔. '미안하다 누부야.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기라. 이런 고기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세상에 누부는 하나 밖에 없는 기라. 열심히 밥 주고 빨리 키워서 누부한테 꼭 잉어 요리를 해 줄 거구마 ...' 새처럼 말을 잃은 누이, 꽃처럼 잠만 자는 하얀 누이. 그 아름답던 누이가 병 속의 알약마냥 힘없이 쓰러져 갈 때도 그 여름 내내 석류꽃은 예쁘게 꽃을 피웠다. "누부야. 이건 누부의 하늘이다. 어느 곳에 생기는 무지개던간에 내가 이 거울로 꼭 무지개를 보여 줄 기구마. 나는 매일 매일 하늘한테 기도를 한데이. 그러면 하느님이 이렇게 말하지를 ... '아직 비를 안맹글랐응께 조금만 기다리구마 ...' 누부야 참말로 예쁘재 ... 이 꽃이 다 떨어지면 장마가 시작될 기라 했데이 ..." 뭉글뭉글 이상한 것들이 목구멍 가득 넘어올 것 같던 그 해 여름, 구름은 더디고 느리게만 흘러서 먼데를 향하는 눈엔 바람 품은 미루나무 숲도 뵈지를 않고 나무 위를 지나는 새떼들도 뵈지를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아주 오래된 여름의 어느 날 어느 날 ... 그녀가 옥탑방에서 모습을 감추고 어른들의 눈물 속으로 사라졌을 때, 마당의 석류꽃이 피었다 쓰러지고 기나긴 장마가 거짓말처럼 깨끗이 끝장 났을 때 ... 그날, 아아 ... 그날 ... 하늘에 걸려 있던 무지개, 슬픈 누이의 하얀 무지개 ... <...동화작가 김계희님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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