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참 가난했습니다.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모두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연탄화로에 꽁치나 고등어 굽는 냄새가 집집마다 피어오르면 안 보고도 이웃집 저녁반찬을 알 수 있는 담장 낮은 집들.
저희는 가난하지만 아빠가 군인이라 월급을 오셨기에 배곯는 고통이나 병원에도 못 갈 정도는 아니었지요. 물론, 장난감도 새옷은 꿈도 못 꾸었지만... 제가 6살 때 할아버지댁에 갔다가 늑막염에 걸려 오래 고생하고 난 뒤부터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40년 전 일이 지금도 몸서리처지는 건, 그 때 맞은 주사와 한 웅큼씩 먹어야했던 약들 때문이었나 봅니다. 결핵, 빈혈, 신장염, 심한 알러지증세...
툭하면 픽 쓰러져 아빠 등에 업혀 응급실에 가 있고, 꽁치나 고등어를 한 점 먹을라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달려가야 했습니다. 꼬챙이처럼 마른 저를 어른들은 나무젓가락이라 놀렸고, 아이들은 콩나물이라 놀려댔지요. 늘 하늘이 노랗게 보여 아이들과 골목에서 뛰어놀지도 못했고, 운동회 날에도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들의 경기모습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땀을 흘리며 뛰는 아이들을 한없이 부러워하며.
60년대엔 병원 가는 아이들이 거의 없을 때였지요. 추운 겨울이면 누런 코를 흘리는 아이들의 소매는 늘 말라빠진 콧물로 반들반들했을 정도였고, 장갑이 없어 손등이 터진 아이들이 정말 많았지만, 감기는 콩나물국으로 이겨내라는 게 유일한 감기처방이던 그 시절에 저는 고열감기나 급성 편도선염이나 후두염으로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을 먹어야 겨우 나을 수 있었습니다. 살림이 빠듯한 엄마는 병원비 축내는 제가 야속했는지, "기집애가 노상 아파서 병원약이랑 주사를 끼고 사니 어쩌면 좋아."라고 하시며 혀를 끌끌 차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엔 늘 아빠 등에 업혀 갔습니다. 초등학교 4~5학년 때까지도 아빠 등에 가뿐하게 업힐 정도로 중량이 안 나갔기에 아빠 등은 참 넓고 편했답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아픈데 왜 태어났을까? 나만 안 태어났어도 우리집은 덜 가난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아빠등에 기대곤 했지요.
어려서 부모 애태우며 병원에 다녀선지 제 아이들도 병원에서 귀빈대접 받을 정도로 자주 드나듭니다. 둘째인 아들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중환자실에서 장기간 입원했었고 입원을 수없이 했지요. 응급실에 간 건 횟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지요. 모체가 약해서 아이가 이렇게 자주 아픈게 아닐까 마음아파 하곤 합니다. 제가 성인이 되면서 병원 가는 횟수가 다소 줄듯이 아들녀속도 어른이 되면 좀 덜 아프젰지 하며 바라곤 합니다.
한 반에 70명의 아이들이 수업을 받았지요. 제 앞에 앉았던 숙희의 머리엔 늘 이가 기어다녔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책걸상에서 앞 자리 숙희의 머리를 보게 될라치면 놀라곤 했습니다. 이가 머리에서 내려와 어깨로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내게 건너올 것 같아서요. 아무도 그 애와 얘길하지 않은 것 같았고, 점심시간이면 그 앤 살그머니 나가있다 들어오곤 했습니다. 다들 보리밥에 콩장이나 멸치볶음, 김치가 반찬인데 그 애는 도시락을 일년내내 못 싸왔습니다. 중학교로 진학할 때도 한 반에 여자애 몇 명은 진학을 못 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업해서 동생들 공부시켜야 한다고...
요즘 같으면 `왜 내가 동생을 이해 희생해야 하느냐'며 부모에게 따질텐데, 60~70년대 아이들은 한없이 순종적이고 착해서 맏딸은 중학교에 못 가도 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곤 했지요. 그렇게 착하게 희생한 40대 후반의 우리 또래들은 결혼해선 남편과 자식 위해 또 희생하며 살고 잇겠지요. 저희 부모님들이 자식 위해 무조건 희생하며 살아온 삶을 받아들이듯.
가난이 너무나 싫었던 그 때는 부모 원망도 많이 했지만, 결혼할 때까지 아픈 딸을 끝까지 돌봐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고 삽니다. 가난하지만 늘 자식을 사랑한 부모님이 계셨기에 오늘의 저도 저희 가족도 있는 것이겠지요.
가난한 집들의 초라한 살림살이와 꼬죄죄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문득 그립습니다. 이젠 오래 전 추억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는 내 아픈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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